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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9 11: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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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국군발달사-<38>국군의 해외파병-파월영웅2
[군사기획] - 국군발달사
<38>국군의 해외파병-파월영웅2
‘솔선수범’ 군인의 길 걸은 이인호 소령

1964년 국군 비전투부대가 파견된 데 이어서 추가 요청으로 65년 9월부터 전투부대인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의 베트남 파병이 이뤄졌다. 청룡부대라 불린 제2해병여단의 주둔지는 뚜이호아(Tuy Hoa)였다. 인근 깜란 항을 이용해 상륙한 부대는 그해 12월부터 파월부대로서는 최초로 여단급 규모의 작전인 청룡1호작전을 전개했으며, 이듬해 2월까지 재건1·2호 작전 등 지역평정작전과 대민지원활동으로 현지인들의 신뢰와 지지를 받았다.

청룡부대는 66년 7월 22일에서 8월 17일 사이에는 ‘뚜이호아 고별전’이라고 불린 해풍작전을 실시했다. 해풍작전은 뚜이호아 주민들의 “청룡부대 이동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월군이 추라이지구로 이동하기 직전에 실시됐는데, 당시 미레마을의 동굴을 수색하던 중 제3대대 정보장교인 이인호 대위가 희생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대위는 일찍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흠모해 해군사관학교를 지원하여 충무공의 후예로서의 꿈을 키웠으며 임관과 함께 ‘바다와 육지의 사나이’ 되기를 열망해 해병을 지원했다. 어려운 훈련마다 자진해서 군인으로서의 길을 걸어간 그는, 공수특전훈련도 자원해서 수료했다. 평소에 동료들에게 “전투라면 적의 심장부에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곤 했으며, 해병대 파병 제1진에 자원해 용약 제일선에서 적과 싸웠다.

그는 부하사랑이 남달랐으며, 작전이 없는 날이면 시를 쓰거나 고국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와 후일 해병장교가 된 아들과 귀여운 딸에게 편지를 썼다. 유고시 ‘향수’에서 그는 “10월이 오면/ 가랑잎 지는 곳/ 영 넘어/ 그 마을/ 알뜰한 삶 위해/ 잊으려/ 잊으려 해도/ 못내 이겨 피는 ‘노스탤지어’/ 오늘도 푸른 하늘/흐르는 구름 따라/ 그리움은 이네/붉은 감빛을 찾아”라며 가족을 그리는 심정을 노래했다.

마침내 해풍작전이 막바지에 이른 8월 11일,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날 아침 일찍 베트콩이 출현했다는 첩보를 접수한 그는 9중대의 1개 소대를 이끌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적이 은신해 있는 마을을 수색해 2명의 베트콩을 생포하고, 다시 이들을 신문해 나머지 5명의 베트콩이 대나무 숲 동굴에 숨어 있음을 알아냈다. 오후 2시, 이 대위는 생포한 포로 2명과 함께 동굴에 도달해 출입구를 폭파한 후 1개 분대로 굴 속을 수색했지만 총 몇 자루와 탄약상자가 전부였다.

이에 이 대위는 재수색을 실시하기로 하고 분대장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직접 앞장서서 굴 안을 수색해 들어갔다. 그런데 전지를 켜고 들어가던 그에게 돌연 ㄱ자로 굽어진 곳에서 수류탄 한 개가 날아왔다. 그는 럭비선수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그것을 안쪽으로 던져넣었다. 그 순간 두 번째 수류탄이 날아왔다. 미처 던질 시간조차 없자, 그는 뒤따라 오던 부하들에게 대피하라고 외치면서 스스로 몸을 날려 수류탄을 덮쳤다.

장렬한 전사, 분대원들이 목도한 상관의 싸늘한 주검과 더불어 적의 전멸, 이것이 해풍작전의 종결이었다.고 이인호 대위는 소령으로 추서됐고 군인으로서 최고 영예인 태극무공훈장과 미국의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모교인 해사 교정에는 동상이 세워졌다. 당시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이토록 장렬한 삶과 죽음이 또 있단 말인가.

사람이면 으레 죽음을 선고받고 태어난 몸. 그러나 이처럼 의연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했고, 이효상 국회의장은 “그대 몸은 부서져 가루가 되고/ 피는 흩어져 이슬이 되었거니/ 타는 불이여 이 가슴마저 태웠다”라며 추모시를 헌상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국방일보-200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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