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인 장군은 강직한 장군으로 유명하다. 그는 육사6기로 임관, 6·25 때는 대위로 육군본부 작전장교로 근무했고, 낙동강 방어 시에는 6사단 19연대 작전주임으로 특유의 기지를 발휘해 부대의 작전성공에 기여했다. 그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면서 개성이 강하고 직선적인 성격으로 장군 중 걸출한 장군으로 회자되고 있다.
운명의 갈림길이 된 1950년 10월 하순 그는 소령으로 진급해 개인적으로 영예스러운 날이었으나 전쟁 상황은 중공군 참전이라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19연대 작전주임이던 그는 중공군 1차 공세 때 평북 희천에서 중공군에 포로가 됐다가 탈출해 다시 적에게 붙잡히고, 또다시 탈출하는 등 사선을 넘나드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그가 포로가 된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중공군 개입이라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50년 10월 26일 14시 15분 6사단 7연대 1대대가 초산의 압록강변 신도장에 최초로 도달한 그날 중공군은 이미 압록강상의 3개 도강지점, 단동(신의주 대안)·장전하구(수풍댐 대안 남쪽)·집안(만포진 대안)을 통해 국군·유엔군이 국경선으로 진격해 들어가는 산악지형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이때 맥아더는 전쟁 종식을 위해 마지막으로 추수감사절 공세를 명령, 북진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에 6사단도 초산~벽동 간의 국경선으로 진출하기 위해 7연대를 초산, 2연대를 온정리 ~벽동으로 진격게 했고 19연대를 예비로 뒀다.중공군 전술은 기동력이 뛰어난 정예부대를 아군의 후방으로 침투, 퇴로를 차단한 후 다중 포위를 통해 아군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중공군의 이런 전술에 국경선에 먼저 도착한 6사단이 걸려들었다.
중공군은 그들의 배치 종심으로 들어온 7연대의 진격을 그대로 방치했다가 뒤늦게 포위망 속으로 들어온 2연대를 공격해 6사단 2개 연대(2·7연대)의 퇴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섬멸적 타격을 가했다. 이에 국군2군단은 2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19연대와 8사단 10연대를 구원부대로 보냈으나 이들 부대도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고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분산됐다. 이때 19연대장 박광혁 대령이 전사했고, 박정인 소령을 비롯한 연대본부 요원들은 포로가 됐다.
그는 벽동에서 탈출해 붙잡혔다가 다시 탈출해 험산준령과 철로를 따라 남하, 임진강을 건넌 후 51년 3월 14일 마침내 일행 5명과 함께 6개월 만의 탈주 끝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영하 35도의 혹한과 360km의 적진을 돌파했고, 어렵고 힘든 탈출과정에서도 원산·평강 일대의 적 방어 배치·보급소 위치를 알아내 폭격게 하는 등 군인정신을 발휘했다.
그는 조국과 군밖에 모르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진급이 늦어 6기생 중 마지막으로 별을 달았으나 드높은 기개와 책임질 줄 아는 장군의 면모는 4성 장군 이상이었다.
패튼 장군을 가장 존경해 한국의 패튼임을 자임한 그는 패튼식 행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는 백골사단장으로 부임하자 무너져 가는 백골정신의 전통을 잇게 했고, 모든 부대시설과 배치를 북쪽으로 향하도록 함은 물론 장병들의 소변도 북쪽을 향해 누도록 했다. 이북이 고향(함남 신흥)인 그는 부대 안에 북진통일의 탑을 세워 통일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기골이 장대한 맹장(猛將)이면서 남다른 학구적 성품으로 군사(軍史)에 조예가 깊은 문무겸장(文武兼將)이었다. 그는 우리 군도 전통이 있어야 한다면서 외아들을 어릴 때부터 장군복을 입혀 키웠고, 그것도 모자라 아들·손자를 육사에 보내 3대 무인가문의 전통을 이어 가는 참다운 군인의 모습을 보여줘 귀감이 되고 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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