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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신뢰받는 국군 되려면 강력한 국방력 갖춰야” | 창군원로가 보는 국군 60년 백선엽 예비역 대장 |
- 창군 원로로서 건군 60주년 국군의 날을 맞은 감회와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창군에 참여하신 경위와 광복 직후의 한반도 정세는 어떠했는지요? “올해는 정부 수립 60주년인 동시에 건군 6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가로 출발한 나라 중에서 이처럼 든든한 국력과 국방태세를 60년간이나 유지해 온 나라는 아마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입니다. 1948년 건군 당시 우리 군은 5만여 명의 병력에 일제 99식 소총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70만 병력에 첨단 무기를 갖춘 세계적인 군대로 성장했으니 참 기적 같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나는 45년 8월 15일 중국 땅 압록강 부근에서 만주군 중위로 복무 중 광복을 맞아 고향인 평양에 돌아왔습니다. 그 후 친척 소개로 고당 조만식 선생의 비서실에서 근무하다가 소련의 사주를 받은 적위대가 고당 선생을 고려호텔에 감금한 사건을 보고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과는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45년 12월 27일 밤 평양을 떠나 38선을 넘어 왔습니다. 미 군정은 45년 11월 군정청 내에 국방사령부라는 부서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국방부의 전신입니다. 그해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가 생겨 이듬해 46년 4월에 문닫을 때까지 200여 명의 졸업생이 배출됐습니다. 군정청은 그 학교 수료자들을 장교로 임관시켜 각 지역에 창설되기 시작한 연대로 배속했습니다. 처음 미 군정은 국군을 만들려고 했습니다만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의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독립도 하지 않은 나라에 군대를 둘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칭을 달리해 필리핀 경비대를 모델로 해 조선경비대를 만들었습니다. 46년 1월 15일 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지금의 태릉에서 660명의 국방경비대 제1연대 1대대 A중대가 창설됐습니다. 이 부대가 국군의 뿌리인 셈입니다. 그 뒤 계속해 각 지방에 2연대에서 9연대까지 창설이 이어졌고, 군사영어학교 출신 장교들이 이 부대들을 이끌었습니다. 나는 부위(중위)로 46년 2월 26일 임관해 부산의 5연대 A중대장을 맡아 부산지역 부대 창설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때부터 2년여 동안 대대장·연대장·여단 참모장직을 수행하면서 초창기 건군 과업에 참여했습니다.” - 창군 초기와 현재의 군 모습을 비교해 말씀해 주십시오. 초기 한국 군대가 특히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건군 직후의 한국군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미 군정 당국의 무원칙한 모병정책으로 잡다한 사설군사단체 대원들이 들어와 초기부터 많은 모순과 불씨를 안고 출발했습니다. 내가 근무하던 부산은 전국 철도평의회가 있는 곳이어서 좌익이 셌습니다. 나는 북한의 상황을 똑똑히 본 경험이 있어 지휘관 정신교육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덕에 제주 4·3사건과 여순 사건의 와중에도 내가 지휘한 5연대에서는 좌익준동 사건이 한 건도 없었습니다. 교육훈련은 일본식 훈련개념을 적용했고, 과거 일본군이 사용하던 99식·38식 소총을 사용했습니다. 일본식 훈련에서 미국식 훈련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을 겪었습니다. 국방경비대 창설 당시에는 일정한 제복 규정이 없어 일본군의 복장을 개조해 입었습니다. 대부분 인근 일본군 창고에서 조달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지역 연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당시 국방경비대 장교들 가운데는 영어·중국어·일본어에 능통한 장교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일본·중국·몽골·러시아·미국인들을 다 접해 보았습니다. 전쟁은 나이로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때 이미 군인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갖추고 있었다고 자부합니다.” - 6·25전쟁 당시 한국 군대가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조국을 지켜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첫째는 맨주먹으로라도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장병들의 투혼과 희생정신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그날의 상흔을 되새기며 조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장렬히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거룩한 희생정신 앞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습니다. 3년의 전쟁 기간 중 60만 명이 넘는 우리의 젊은이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이름 모를 산하에서 죽거나 적의 포로가 됐습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서 전쟁 유가족과 참전전우들을 적극 배려하고,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다행입니다만 아직도 아물지 않은 그 상처들을 싸매는 데 국가가 더욱 앞장서야 합니다. 둘째는 당시 가난한 신생국가 대한민국을 아무 조건 없이 도와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희생입니다. 국민소득 50달러도 안 되던 초근목피(草根木皮)의 나라, 총 한 자루도 못 만들던 나라의 군대가 미군을 만나 오늘날 세계적인 강군으로 성장했습니다. 진정 신의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걸음마를 배우던 국군에 미군은 무기를 주고 군사지식을 가르쳤습니다. 더군다나 6·25전쟁 때는 3만6940명이 이국땅에서 전사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 두 번의 참모총장과 최초의 대장이라는 특이한 경력을 가지셨습니다. 총장 재임 중 기억할 만한 일이나 성과를 말해 주십시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무래도 국군의 전력증강, 그리고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관련된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 두 가지는 공교롭게도 당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과 관련된 일이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선거공약 대로 한국을 방문한 것은 52년 12월 2일 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나는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레드포드 태평양함대사령관·클라크 유엔군사령관·밴 플리트 8군사령관·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과 함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회의는 당시 동숭동 서울대 건물에 있던 미8군사령부에서 열렸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한국군 20개 사단 증편계획을 설명했고, 미국 1개 사단을 유지하는 비용으로 한국군 2~3개 사단의 유지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계획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 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군을 20개 사단, 65만5000명 규모로 증강시키는 최종안을 승인해 줘 정전 당시 우리 육군은 20개 사단 60만 병력의 대군이 됐습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관련해서는 53년 5월 초,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씨앗을 심었습니다. 펜타곤에서 미군전우들을 만나 한국의 장래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알레이 버크 제독이 친절히 대해 주었습니다. 그는 지금 미국의 정전 방침이 이미 굳어져 있으니 미국으로부터 군사적·경제적 보장을 받아내려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직접 만나보라는 겁니다. 이튿날 나는 콜린스 총장에게 찾아가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난색을 표하는 그를 설득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단독 면담하게 됐습니다. 창가에 큰 책상이 하나 놓여 있는 집무실은 생각보다 검소했습니다. 수인사 끝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 정부와 국민이 정전을 반대하는 뜻은 잘 알고 있으나 한국전쟁 종식이 나의 선거 공약이며, 영국과 여러 동맹국이 정전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한국 국민들은 안전보장을 위해 미국의 방위조약을 원한다고 요청하니까, 대통령은 아시아 국가와 방위조약을 맺은 전례가 드물다고 머뭇거리더니 스미스 국무차관을 만나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미 방위조약 문제를 협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시발입니다.” - 건군 60주년을 맞은 오늘날 우리 국군을 냉정히 평가한다면 어떻습니까? 후배 장병에게 바라는 당부나 조언이 있다면. “정전이 된 지 5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반도에는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총성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난 정권들이 소위 햇볕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국가안보를 도외시하고 반공교육을 소홀히 했던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국군장병은 물론 6·25전쟁을 모르는 전후세대들에게 우리의 안보현실을 올바르게 교육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최근 여간첩 사건에서 보았듯이 지금 우리 군의 중추역할을 하는 각급 지휘관과 참모·부사관들이 명확한 국가관과 안보의식을 새로이 하지 않으면 첨단장비와 시스템도 사상누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국민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는 국군이 되려면 강력한 국방력을 갖춰야 합니다. 정부의 대북정책도 튼튼한 안보가 확립됐을 때 가능합니다. 강력한 군사력이 반드시 앞서야 된다고 봅니다.” - 앞으로 우리 군대가 지향해야 할 모습과 발전방향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6·25전쟁 초기 한미 연합군은 북진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미국으로부터 안전보장과 전력증강, 경제 원조를 얻어냄으로써 군과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미국은 한국군 전력증강을 위해 한국군 증편과 함께 국군 장교 2000여 명을 미국 17개 병과학교에 유학시켜 오늘날 각 병과학교를 발전시켰습니다. 제주도에 보충훈련소를 개설해 10만여 명을 집중 훈련시켜 국군의 발전을 도왔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를 알고, 어려울 때 도움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에서 국민소득 2만 달러 국가가 됐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됐습니다. 오늘날 한미 간에 갈등이 있고 국민의 정서도 일부 달라졌지만 한미동맹은 과거 반세기 넘게 우리나라 안보체제의 핵심이었으며, 경제발전의 튼튼한 버팀목이 됐습니다. 앞으로도 한미동맹을 더욱 발전시켜 한미 연합방위 태세를 굳건히 하는 것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 백선엽 장군은 누구인가 백선엽(88) 예비역 육군대장을 수식하는 말은 많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요원, 군내 좌익세력을 척결한 숙군(肅軍)과 여수·순천 반란군 진압 책임자, 6·25전쟁 당시 국군 1사단장, 낙동강 방어전 최고 수훈자, 평양진격 선두 부대장, 정전회담 첫 한국 대표, 지리산 공비토벌부대 사령관, 전쟁 중 하루도 전선을 떠나지 않은 지휘관, 육군참모총장 두 차례 역임, 대한민국 최초의 4성 장군, 아시아 최초의 야전군사령관, 검증받고 또 검증받은 군인, 한국전쟁의 영웅…. 이 많은 수사가 말해주는 대로 그는 60년 한국군이 걸어온 역사의 산증인이다. 국방경비대 창설 때부터 지휘관으로 군에 몸담은 그는 미수를 넘긴 지금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서 군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한국군의 상징적인 인물이다.1920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난 그는 1945년 12월 월남해 미 군정청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함으로써 국군과 연을 맺었다. 49년 약관 스물여덟 살에 5사단장이 됐다.6·25전쟁 발발 당시 1사단장으로서 서울 북서부 전선을 맡아 싸웠고, 낙동강 방어전에서는 전략 요충지 다부동 지역을 사수했다. 그 뒤 북진공격에서 평양에 선두로 입성한 기록이나, 서울 재탈환전에서 세운 전공, 군단장 또는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이룩한 전공과 업적들은 뛰어난 능력과 성실성의 산물이었다. 그와 함께 한국전쟁을 지휘한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과 밴 플리트 장군은 “백선엽은 검증받고 또 검증받은, 더 바라거나 나무랄 데 없는 군인이었다. 백 장군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작전지휘관이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아이젠하워 장군이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라면 우리에게도 한국전쟁의 영웅이 있다. 백선엽 장군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만약 건군 60주년을 대표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군인을 꼽으라면 그가 바로 백선엽 장군이다. <정리=문창재 객원기자/사진=정의훈 기자> |
[국방일보-2008.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