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강문수 (姜文秀)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병
  • 군번 : 0384441
  • 전몰일자 : 1951-9-9

공훈사항

강문수 일등병은 전라남도 광주시(光州市) 서석동(瑞石洞)에서 태어나
육군에 입대하여 제7사단 제5연대에서 근무하였다.
제7사단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1연대는 경기도 동두천지구를 제9연
대는 포천지구 정면을 맡아 분전하였으나, 북한군 최정예인 제3사단과 제
4사단 및 105전차여단의 집중공격을 받아 26일 밤에는 의정부가 실함될
정도로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 북한군은 최정예 주공을 제7사단 방면으
로 향함으로써, 정부에서는 6월 27일 서울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이어
6월 28일에는 육군본부와 국군이 전면 철수하며 한강교가 폭파되는 등 한
강방어선으로 물러서는 계기가 되었다.
7월 5일 제7사단은 해편되어 예하 연대는 제1군단의 각 사단에 편입되
었으며, 7월 10일 전주에서 학도병 500명을 신병으로 보충받아 제3·9연대
를 기간으로 사단을 재편성하였고, 7월 14일에는 사단을 민부대로 개칭하
였다. 이후 민부대(지휘관 閔耭植 대령)는 7월 16일부터 31일까지 전주-
임실-남원-운봉-함양 등지로 철수하면서 북한군 제6사단의 호남지역
으로의 우회진출을 유도 지연시키기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8월 15일부
터 19일까지 민부대는 포항지구 전투에 참가하여 북한군 제5사단의 진출
을 저지한 후, 작전지역을 제3사단 제23연대에 인계하였다.
8월 20일 제7사단은 대구에서 제3·5·8연대와 제18야포대대로 재편성되
었다. 이후 8월 29일까지 낙동강 북부지역(의흥지구)에서 방어전투에 참가
하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는 영천전투에 참여하였다. UN군의 인천상륙
작전 이후 제7사단은 10월 1일부터 9일까지 안동-청주-양평-포천-양
문리로 이동하여, 양문리(포천)에서 38도선을 돌파하고, 10월 9일부터 16
일까지 양문리 - 김화- 평강-정봉리로 이동하였다.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제7사단 제8연대는 제1사단과 함께 평양의 배
후로 우회공격작전을 전개하여, 김일성대학을 점령하고 평양시내에서 잔
적소탕작전을 실시한 이후, 10월 22일까지 강동-평양-순천-개천-구장
동으로 진출하였다. 11월 1일부터 26일까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말미암
아 비호산전투 후 개천-덕천-북창-순천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1950년
12월 2일부터 1951년 1월 8일까지 승호리-수안-시변리-연천-원주-
영월선으로 철수하였다.
1951년 1월 19일부터 2월 4일까지 평창-정선선에서 북한군 제9사단의
공격을 저지하였고, 2월 12일부터 4월 22일까지 영월-평창-인제-현리
지역 일대에서 전투를 하였다. 4월 22일부터 6월 12일까지 중공군의 제1·
2차 춘계공세로 인제·홍천·춘천·화천지역에서 밀고 밀리는 쟁탈전을 전개
하였다. 8월 6일부터 9월 2일까지 618-901-883고지 작전을 전개하였고,
9월 24일부터 27일까지 백석산(1,142고지)전투를 실시하였다.
강문수 일등병은 제7사단에서 복무하던 중, 1951년 9월 9일 중공군과
618고지전투에서 쟁탈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살신보국
정신(殺身保國精神)을 선양하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하여 전쟁기념
관 전사자명비(戰死者銘碑)에 이름을 새겨 추모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