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강선희 (姜善熙)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5305030
  • 전몰일자 : 1951-10-20

공훈사항

강선희 하사는 1929년 4월 20일 전라남도 화순군(和順群)에서 태어나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본부 직할부대에서 복무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전 전선에서 국군이 철
수를 거듭하게 되자, 채병덕 총참모장은 우선 육군본부 직할 모든 재경부
대를 동원하여 의정부지구 방어에 중점을 두고 전방의 제1, 제6, 제7사단
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증강함으로써 수도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모든 노
력을 경주하였다.
따라서, 6월 25일 11:00에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연대를 제7사단에
배속하고 이날 오후에는 제18연대(-1)도 추가로 배속하였으며, 제8연대
를 배속하여 가평 지구로 투입하였다.
또한, 서울특별연대는 제1사단에, 육사생도대대(전투경찰 1개 대대 배속)
는 제7사단에, 포병학교 제교도대대는 제1, 제6, 제7, 제8사단에 배속하였
으며 6월 26일 저녁에는 육군본부 장교연대를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시켜 창동지역에 배치하였다.
그후, 국군은 의정부-창동-미아리 방어선에서 육탄공격까지 감행하면
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
하고 6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내어주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
하여 한강방어선에서 7일간을 지탱한 후, 시흥-수원-평택-대전-김천
을 거쳐 8월초에는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후, 쌍방은 남북을 오르내리며 일진일퇴를 거듭한 격동의 1년이 지나
고, 쌍방은 다시 형성된 38도선 부근의 새로운 전선에서 상호 대치하게
되었으며, 전투는 소강상대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1951년 7월 10일부터
휴전회담이 개시되었으며 이로써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휴전회담이 개시되면서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전선은 1951년 8월에 접
어들면서 다시 격렬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쌍방은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로 의견이 대립되어 회담은 정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휴전회담이 결렬되자, 유엔군은 휴전 당시의 접촉선을 휴전
선으로 하는 안을 관철시키기로 하고 제한된 범위의 공격작전을 감행하였
다. 10월말까지 계속된 이 공격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당시의 대치선에
서 평균 10KM 전진하였다.
강선희 하사는 교착전 기간 중, 1951년 10월 20일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전공을 기리어 1951년 12월 30일 무성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하였으며, 그의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기리고 후세에 교훈으
로 남기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명비(戰死者銘碑)에 그의 이름을 새
겨 추모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