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복균(이복균)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7900718
  • 전몰일자 : 19500627

공훈사항

이복균 일병은 출생 일자 및 출생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몰 일자를 고려할 때, 이 일병은 1950년 3월경에 입대 후 제8사단 직할부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의 부대 전입 당시 제8사단은 단양, 제천 등 총 8개 군 지역에서 북한의 무장유격대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50년 4월 22일까지 시행되었던 공비토벌작전은 북한유격대와 공비들을 전부 소탕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토벌 작전을 마친 제8사단은 강원도 강릉으로 이동하여 경계 작전을 수행했다.
북한군은 1950년 6월경에 무장공비 60여 명을 침투시켜 국군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전투 병력의 분산을 유도했지만 작전 개시 5일 만인 1950년 6월 20일 대부분의 공비가 사살되며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어서 북한군 제5사단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엄청난 포병 화력의 지원을 받으며 7번 도로 축선에 투입하여 주문진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에 강릉에 주둔해 있던 제8사단은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지연전을 펼쳤지만 적의 화력에 주문진을 상실하고 철수를 시작했다.
철수를 완료한 제8사단은 증원을 기다리며 연곡천 주저항선에 병력을 배치하고 사천국민학교에 사단 전술 지휘소를 설치했다. 당시 제8사단의 방어구역은 연곡천부터 송림리에 이르는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다. 연곡천은 수심이 깊어 도섭이 불가능했고 자주포를 포함한 중장비 또한 통과할 수 없었다. 이에 제8사단은 연곡천 부근에 살상지대를 설정하여 적을 유인, 격멸하려고 했으나 적은 곧바로 공격해 오지 않았다.
제8사단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주저항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천마봉을 공격해 탈취함으로써 주문진 재탈환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얼마 후 북한군은 천마봉과 아군의 주저항선을 동시에 공격해 왔고 전쟁 초기 북한군의 화력은 아군에 비해 우세했기 때문에 아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를 완료한 제8사단은 분산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했으며 적시에 도착한 증원병력과 함께 북한군의 진격을 막고자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 일병은 1950년 6월 27일 전투 중 적탄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복균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위패(33판-40면-2199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8-ㅁ-074)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