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보원(李保元)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500884
  • 전몰일자 : 19510812

공훈사항

이보원 하사는 1928년 2월 20일에 경상남도 부산시 서구 부민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반격을 준비하던 1950년 9월 11일, 대구에 설치된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재창설된 제2사단 직할부대인 수색대로 전속되었다.
이봉원 하사가 전입했던 때, 제2사단은 철원-포천-홍천 일대에서 후방교란을 실시하고 있던 북한군 패잔병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얼마 후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던 유엔군 주력은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38도선으로 철수했고, 이때 제2사단은 포천 북방의 양문리-탑두울을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추후 예상되는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예상대로 중공군은 12월 31일 야간에 드디어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시작하여 서울을 압박했다.
제2사단 장병들은 중공군의 공격에 하룻밤을 버티지 못하고 다음 날인 1951년 1월 1일 새벽에 진지에서 이탈하여 청평으로 철수했다. 이봉원 하사가 소속된 수색대는 1월 3일에 청평에 도착하여 여주로 이동했다. 그리고 1월 7일에는 충주에 집결한 후 미 제10군단 예비사단으로 풍기에서 재정비하며 충주-단양 간 병참선을 경계했다. 그러던 중 2월 13일에 사단을 따라 안동으로 이동하여 일월산과 보현산 일대에서 잔적 소탕작전을 실시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후방지역작전을 완료하고, 4월 28일에 청평 일대의 전방작전지역으로 이동하여 미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미 제9군단은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즉각 반격으로 전환하였다. 당시 제2사단은 육단리 방면으로 진격했고, 이봉원 하사가 소속된 수색대는 적진에 침투하여 적 후방을 교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사단은 6월 중순에 육단리-적근산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유엔군사령관은 휴전협상을 지연시키는 공산군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각 부대에 공세적인 행동을 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제2사단은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745고지를 탈취하기로 하고, 8월 2일 공격하여 탈취했으나 중공군의 즉각적인 역습으로 다시 빼앗겼다. 이후 쌍방 간에 745고지를 두고 쟁탈전이 8월 8일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소속된 수색대는 8월 8일 공격에 가담하여 목표를 탈취하는 데 기여했으나, 그는 선두에서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8월 12일에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보원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51묘역-2판-2877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19-ㅌ-04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