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보운(李輔云)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9289941
  • 전몰일자 : 19510726

공훈사항

이보운 하사는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에서 1926년 6월 5일에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몰 일자를 고려할 때, 이 하사는 1950년 11월경 입대한 후 제8사단 직할부대에 배치되었다.
이 하사가 부대에 전입할 무렵, 제8사단은 1950년 12월 1일부터 제2군단의 집결지인 평양 동방의 삼동에서 38선을 향하여 철수를 거듭해 율리에서 수안, 신변리를 거쳐 토산에 이르렀다. 토산에서 부대를 재정비한 제8사단은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방어하게 된다. 하지만 1950년 1월 15일까지 계속되는 전투 끝에 좌, 우측 전선이 돌파되었고, 제8사단은 홍천군 방면으로 철수하게 된다.
제8사단은 강원도 횡성군에 주저항선을 설치하고 적의 공세에 대비해 방어진지를 철저히 구축했다. 당시 혹한과 강설로 진지 구축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적의 주 접근로에 지뢰와 장애물을 설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후 제8사단은 1951년 2월 5일부터 국군 제5사단과 함께 홍천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홍천군 삼마치 고개 및 오음산 고지를 선점한 중공군 제198사단의 저항에 봉착했다. 국군은 5일간 제병협동작전을 시행하였으나 전선돌파에 실패했고 특히 제8사단의 피해가 컸기 때문에 제8사단은 육군본부 예비대로 편성되어 후방 경계 임무에 투입되었다.
후방 경계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제8사단 장병들은 1951년 4월부터 무장공비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공비들은 민가, 도로, 행정시설 등에 대한 유격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당시 금산·정읍·순창·부안군 일대에 지역 좌익 및 북한군 낙오병이 합세하여 공비가 약 3,000여 명에 달했다.
1951년 4월에는 금산지구 일대의 공비들을 토벌했으며 5월에 들어서는 국사봉지구와 부안지구의 공비들을 모두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 제8사단은 토벌 작전이 끝나고 1951년 5월 19일 충청북도 제천군으로 이동하여, 미군 제10군단 제3사단의 예비대로 준비태세를 갖추는 한편 후방을 경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 하사는 1951년 7월 26일 북한군의 기습 포격에 맞아 금화에서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보운 하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13판-3면-3554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62-ㅂ-037)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