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보양(李保洋)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01156
  • 전몰일자 : 19500822

공훈사항

이보양 일병은 경상남도 부산시(現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던 1950년 8월 하순경, 대구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했다. 이후 이보양 일병은 헌병으로 분류되어 다시 부산에 있는 헌병교육대에서 헌병임무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을 배우고 同 교육대 조교요원으로 자충되었다.
한편 육군직할 헌병사령부는 美 군정 시절인 1947년 3월 15일에 군감대로 설치하여 운용하다가 1948년 3월 11일에 군기사령부(조선경비대)로 창설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12월 15일에 병과 명칭을 헌병으로 변경했다. 이후 1949년 1월 16일에 서울 용산에서 헌병학교가 창설되어 운영되다가 6·25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 13일 임시 폐교되었다.
그러나 야전헌병 양성을 위해 8월 27일부터 부산에서 헌병교육대를 설치하여 운영했다. 그 후 1951년 6월 20일 헌병교육대를 해체하고 대구에서 육군본부직할로 헌병학교를 재설치하여 헌병요원을 양성했다. 당시 헌병의 임무는 후방지역에서의 질서유지와 포로의 후송, 피난민 속에 침투하는 적 오열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9월 16일부터 반격작전을 실시하여 10월 1일에는 국군 제3사단이 38도선을 돌파하고, 10월 26일에는 제6사단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이 참전하여 두 차례의 기습공격을 받고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국군 장병들은 38도선 일대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차후에 있을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보양 일병은 헌병요원들과 함께 후퇴하는 병력 수습과 교통통제, 낙오자 통제 등의 임무를 완수 후 12월 중순경 부산에 위치한 헌병교육대로 복귀했다. 당시 부산 지역은 북한군 유격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북으로 진격하는 시기에도 그치질 않았다.
헌병교육대는 헌병요원의 교육훈련에 전념하면서 조교를 포함한 기간요원으로 자체방어도 수행했다. 이보양 일병은 1951년 2월 22일 야간 헌병교육대 인근에 게릴라가 출몰하여 부대원들과 함께 이들 소탕 작전에 투입되어 색출된 게릴라와 교전하던 중 적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보양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81-ㅅ-052)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