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호(李炳晧)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사
  • 군번 : 5801089
  • 전몰일자 : 19530425

공훈사항

이병호 중사는 1930년 3월 29일 경상남도 김해군 대동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조국에 헌신하고자 1949년 8월 1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다.
이병호 중사는 6·25전쟁이 발발한 후 낙동강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당시 전황은 낙동강방어선에서 조국의 운명을 건 혈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중사와 장병들은 9월 중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청송-평창-양양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1월 3일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여 양양 남쪽에 있는 원포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이병호 중사와 장병들은 3월 9일 속사리 일대 북한군 지역을 위력 수색해 북한군을 멀리 구축하였고 3월 26일 제2차로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진격하여 4월 15일에는 캔자스선의 동단 남가리로 진출하였다. 5월 7일 중공군 제6차 공세가 시작되어 설악산 부근의 사단 주저항선이 돌파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병호 중사와 사단 병력은 1952년 7월과 8월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전투를 실시하여 북한군을 격퇴하였으나 장병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9월 6일 북한군은 맹렬한 공격준비사격을 가한 후 고지 좌우측 계곡으로 공격해 왔다. 이 중사와 장병들은 최후까지 분전했으나 수도고지를 지켜내지 못하였다. 이후 9월 9일 공군의 근접지원과 포병의 지원 아래 공격을 개시하여 고지를 점령하였다. 이 중사와 장병들은 10월 6일부터 4일간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에 재개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고지를 끝까지 사수하였다. 이후 11월 3일부터 9주간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였다.
1953년 초, 휴전회담이 여전히 중단된 상황에서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쌍방은 상대방에 대한 기선을 확보하고 방어를 하기 위한 수색정찰대 운용을 강화하였고 제한된 규모의 공세적인 전투정찰도 실시하게 되었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병호 중사는 1953년 4월 25일 금성 부근 전투에서 북한군의 기습사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호 중사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45491 육)을 추서하고 위패(35판-2면-08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7-ㅍ-03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