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혁(李丙赫)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사
  • 군번 : 2503479
  • 전몰일자 : 19520529

공훈사항

이병혁 중사는 1929년 12월 20일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조국에 헌신하고자 1948년 11월 19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3사단 제22연대에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병혁 중사는 제22연대에 배치되어 적정탐색, 포로심문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육군직할 제1경비대대로 전속되었다. 육군본부는 후방지역에서의 공비토벌과 보급로 확보, 포로경비 등을 위해 1950년 11월부터 1951년 4월까지 15개 경비대대를 창설했는데, 이 중 제1경비대대는 11월 24일 강원도 울진에서 제3유격대를 개칭해서 창설되었다. 대대는 창설 후 제1군단에 배속되어 동해안 지역에서 북상하는 북한군 패잔병들을 소탕하는 등 군단 후방지역작전을 수행했다.
이병혁 중사와 경비대병력은 그해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로 인해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해야만 했다. 엄동설한 속의 1·4후퇴였다. 1951년 1월 초 평택-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후퇴하였던 국군은 다시 반격을 시작해 2월 10일에는 한강 남쪽에 도달하였다. 이병혁 중사와 경비대병력도 국군의 진격에 맞추어 수도권 일대에서 후방지역 방호작전을 재개했다.
국군은 1951년 3월 15일에 제1사단을 선두로 서울을 재수복했다. 이병혁 중사가 소속된 경비대도 서울로 진주해 패잔병 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북한군 무장공비들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후방이 차단되었던 북한군 주력의 일부가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 시기에 잠입한 북한군 제10사단의 패잔병들과 연결해 산악지대에 은거하면서 후방교란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중사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1952년 5월 29일에 경기도 안양 관악산 일대에서 적 패잔병이 출현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신고를 접수한 제1경비대는 즉각 출동하여 적을 격멸했다. 이 전투에서 이병혁 중사는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던 중 5월 29일 적의 기습사격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혁 중사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26061 육)을 추서하고, 위패(23판-3면-333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87-ㅁ-07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