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태(李炳泰)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756441
  • 전몰일자 : 19520331

공훈사항

이병태 일병은 1930년 4월 20일에 서울특별시 성북구(現 강북구) 우이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38도선 일대에서 전선이 교착된 시점에 1951년 10월 30일,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제5사단으로 현지 입대하여 제27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병태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은 국군과 유엔군이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과 그 북방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편 중공군은 1951년 5월 공세 이후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은 군사작전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휴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7월 10일 최초로 휴전회담이 열렸고, 11월 27일 회담에서 양측은 현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합의했다. 이에 양측은 대규모작전을 자제했고, 전쟁은 휴전회담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작전과 전선 개선, 그리고 휴전 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양상으로 변모되었다.
제5사단은 북한군 제27, 2, 13사단을 맞이하여 9월 4일부터 10월 14일까지 강원도 양구 일대 가칠봉 전투에 투입되었다. 사단은 40여 일간 5,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가칠봉 북쪽 1,211고지를 3번이나 점령했다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 끝에, 동 고지를 적에게 내주었으나 가칠봉과 서희령 전선을 굳건하게 지켜냈다. 사단은 혈전을 벌인 이 전선을 10월 20일에 국군 제3사단에게 인계하고, 육본 직할로 전환되어 강원도 양양으로 이동하여 1952년 1월 12일까지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에 집중했다.
그 이후 사단은 1월 13일부로 제1군단에 배속되어 동해안 거진으로 이동하여 1월 23일부터 제11사단의 전선을 인수하고 554고지-351고지-감호 일대를 잇는 방어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병태 일병이 소속된 제27연대는 사단 예비로 강원도 간성 수동리 일대에 집결했다. 정면의 북한군 제47, 9사단은 월비산을 확보한 상태이었다.
적은 월비산 남쪽의 351고지를 비롯한 제5사단의 전초진지와 주저항선을 공격하기 위해, 7월 초까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제27연대는 진지를 더욱 강화하면서 적정 탐색 및 적 침투 방지를 위한 수색정찰과 매복 작전을 지속했다. 이병태 일병은 1952년 3월 31일 분대원과 함께 351고지 일대를 수색정찰 중 적 포격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태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유해(40묘역-2판-1643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34-ㄷ-05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