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춘(李炳春)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3299
  • 전몰일자 : 19520501

공훈사항

이병춘 일병은 경기도 강화군 송해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있던, 1950년 8월 하순경는 경남 밀양에서 편성된 육군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에 현지 입대했다.
1950년 8월 육군본부에서는 동부전선의 포항지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차단하는 동시에 상륙기습을 통한 양동작전을 계획했다. 하지만 가용부대가 없자 밀양에서 훈련 중이던 유격부대를 선정하였는데, 이 부대가 바로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일명 명부대 또는 제772부대)이었다.
대대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이명흠 대위가 주동이 되어 대구와 밀양 등지에서 모집한 대한청년단, 학도병 등 772명으로 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4개 중대로 편성된 대대였으나 적 기만과 부대원 사기를 고려하여 대대를 사단으로, 중대를 연대로 호칭하여 제28·29·32·37연대로 위장 편성하고, 계급도 위장했다.
대대는 영덕 지구에 상륙하여 북한군 제2군단의 후방을 교란함과 동시에, 인천 상륙작전을 기만할 목적으로 대한해운공사 소속의 LST 문산호에 탑승하여 부산항을 출항, 새벽에 장사동 부근 해상에 도착했다. 대대는 태풍 케지아로 인한 높은 파도와 아군의 상륙을 알아차린 북한군의 포격으로 완전히 육지에 착안하지 못하고 해안에서 2, 30미터 떨어진 상태에서 상륙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이 문산호와 상륙 중인 아군에 대해 집중 사격을 가해옴으로써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문산호까지 닻이 끊어지며 파도에 휩쓸려 좌초되었다.
이때 이병춘 일병은 적 포병사격에 중상을 입고 부산에 위치한 제36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이 병원에서 정성스럽게 치료를 받고 회복하여 1951년 1월경에 부산에 있는 육군 제2훈련소 조교요원으로 재배치되었다. 당시 부산 지역은 북한군 유격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중공군이 참전하자 더욱 심해졌다. 당시 미군의 지원물자가 대부분 부산항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었고, 부산에는 각종 지원부대와 시설 등이 밀집되어 있어 게릴라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훈련소는 조교 및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적 게릴라들 공격에 대응했다. 이병춘 일병은 신병 교육에 전념하다가 1952년 5월 1일 금정산 일대에 출몰한 적 게릴라를 격멸 중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춘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17판-5면-16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7-ㄲ-064)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