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철(李丙喆)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0603
  • 전몰일자 : 19500625(제5연대가 실제 교전을 한 6월 26일 전사한 것으로 추정됨.)

공훈사항

이병철 일병은 경상남도 울산군 하적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과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48년 2월경 제3여단 제5연대에 입대했다. 1949년 7월 10일 제5연대는 제3사단에서 제2사단으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이 무렵 38도선 일대에서는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고 있었고, 후방지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소요사태와 남파된 북한의 유격대에 의한 습격·파괴활동으로 사회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1949년 말부터 북한의 남침징후가 높아짐에 따라 육군본부는 경계강화 지시를 수차례에 걸쳐 거듭 하달했고, 제2사단은 경계강화와 더불어 교육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이 일병은 유사시 조국을 반드시 수호하겠다는 의지와 사명감으로 교육훈련에 적극 임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전에 위치하고 있던 제2사단은 휴가나 외출·외박 중인 병력을 긴급 소집하여 부대가 편성되는 대로 포천 축선에 투입되었다. 이 일병과 제5연대(-) 장병들은 의정부 북방의 축석령으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제5연대는 전투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중화기 실탄이나 수류탄은 한 발도 없었고, 소총탄도 M1 소총 8~16발, 카빈 소총 15~30발을 휴대했을 뿐이었다. 축석령 지역으로 투입된 북한군은 전날 송우리에서 국군 제3연대(-)를 격파한 제3사단과 제107전차연대였다.
제5연대는 6월 26일 3시에 사단지휘소가 설치된 금오리를 출발하여 이동하던 중 본자일 일대에서 적 전차와 조우했다. 연대는 인근의 208고지를 점령, 급편방어로 전환하여 적 전차의 공격에 겨우 소총으로 응수하면서 30분간 교전하였으나 돌파당하고 말았다.
제2사단에 배속된 포병학교 제2포병대대의 직사포 공격으로 적 전차부대가 잠시 물러난 사이 제5연대는 병력을 수습하여 다시 축석령 방어에 임했다. 그러나 곧 적의 강력한 보전협동 공격에 직면했고,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절대적인 전투력의 열세로 의정부 남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전투에서 이 일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으나, 안타깝게도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철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16판-4면-00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7-ㅅ-06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