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채(李炳采)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624758
  • 전몰일자 : 19530306

공훈사항

이병채 하사는 1926년 3월 29일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지루한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1951년 6월 29일,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본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2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병채 하사가 부대로 전입했던 8월 중순, 제6사단은 백암산을 좌우로 있는 고지군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당시 공산군이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로 휴전협상을 지연하자, 유엔사는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군사적 압박이 필요하다고 보고 각 부대에 공세행동으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가 소속된 제2연대는 방어진지 전방에 위치한 등대리 부근의 819고지-462고지를 공격했다. 연대는 8월 31일과 9월 1일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점령하지 못하고, 부대정비를 한 후에 9월 21일에 재차 공격하여 28일에 목표(819고지)를 탈취했다. 더 나아가 사단은 금성천 부근을 장악하기 위해 10월 13일부터 21일까지 공격하여 이 일대를 감제할 수 있는 교암산(770고지)까지 탈취했다.
이후 제6사단은 1952년 1월 10일에 미 제9군단에서 배속 해제되어 양구 일대로 이동하여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에 집중했다. 그리고 3월 22일에 미 제9군단에 재배속되어 김화 부근으로 이동하여 봉화산(477고지)-교암산(770고지)을 잇는 선에 주방어진지로 편성했다. 이병채 하사가 소속된 제2연대는 6월 12일에 방어진지 전방의 감제고지(금성천 동북방 A, B고지)에 대해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6월 15일 탈취하고 적의 증원과 퇴로를 차단했다. 이후 중공군은 9월 29일에 금성천 동북방 A, B고지를 되찾기 위해 강력한 화력지원 하에 공격을 개시했다. 이 고지에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30일까지 2차례나 있었으나, 제2연대는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제2연대는 10월 21일부로 좌(서쪽)로 확장된 책임지역인 552고지에 대한 방어를 담당했다. 그리고 제2연대는 1953년 1월 1일부로 사단의 예비로 전환했다가 2월 5일부로 다시 우일선(동쪽)의 전방방어지역인 교암산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장병들은 방어진지 보강, 그리고 야간 매복작전과 주간 수색작전에 중점을 두면서 교육훈련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이병채 하사가 소속된 소대는 3월 6일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부대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소탕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채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28811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장병1묘역-110판-1727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5-ㅂ-07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