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진(李炳鎭)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0520128
  • 전몰일자 : 19510122

공훈사항

이병진 일등중사는 1930년 4월 8일 경기도 인천시 화수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조국에 헌신하고자 1949년 11월 하순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 제12연대에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병진 일등중사는 고령에서 함창에 이르는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 일등중사가 소속된 연대는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큰 수훈을 세웠다. 그때부터 9월 중순까지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거듭하면서 방어선을 지켜냈다. 9월 15일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병진 일등중사와 연대 장병들은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하였다. 조국 통일의 꿈을 안고 임진강-토산-신계-수안-상원 방향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10월 19일 평양에 최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그와 연대병력이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하였던 중공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였다. 10월 24일 박천-운산 도로와 태천-영변 도로의 교차지점인 용산동 남쪽 1km 지점에서 북한군은 전차로 증강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배치하여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이 일등중사가 소속된 연대는 25일 아침 운산공격을 개시하였다.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한 지 닷새째인 11월 28일 연대병력은 태천 외곽까지 진출하였으나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박천 북쪽의 중막동-용산동 선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박천-용산동 일대를 고수하기 위하여 총력을 다 하였으나 계속적으로 증원부대를 투입하는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51년 1월 5일 안성 북쪽에 배치된 이병진 일등중사와 연대 장병들은 방어진지를 보강하면서 개전초기와 ‘1.4후퇴’로 두 번씩이나 서울 사수에 실패한 불명예를 씻기 위해 심기일전하여 불퇴전의 정신력 배양, 교육훈련, 장비보충에 주력하였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하였다.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병진 일등중사는 1951년 1월 22일 안성 부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진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13-ㅈ-02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