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준(李炳俊)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상사
  • 군번 : 5700264
  • 전몰일자 : 19530108

공훈사항

이병준 일등상사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문배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9년 10월 중순, 서울 용산의 야전포병단으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육군직할 제3포병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제3포병대는 제6사단을 직접 지원했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전면적인 남침을 감행했다. 제6사단은 춘천-홍천 북방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3일간 저지하고 6월 30일에 횡성을 거쳐 원주로 철수했고, 이어 원주-충주-문경-함창 축선에서 7월 한 달 동안 지연전을 수행했다. 이후 사단은 낙동강방어선을 점령하여 북한군의 8월 및 9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6일부터 낙동강 선에서부터 총반격작전을 실시했다. 당시 제6사단은 함창-충주-원주-춘천 방향으로 공격하여 10월 5일에 춘천 북방에서 38도선을 돌파하고 10월 23일에 희천을 점령했다. 당시 이병준 일등상사 제3포병대는 포병화력으로 지원하여 제6사단의 공격의 속도를 증가시켰다.
국군과 유엔군은 선두부대가 압록강까지 진출했으나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했다. 당시 제6사단은 12월 초에 북창-시변리-고랑포 지역으로 철수하여 12월 11일에 동두천 북방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로 평택-삼척 선으로 철수했으나, 이후 중공군의 2월 공세, 4월 공세, 5월 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재반격하여 임진강-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캔자스선을 확보한 상황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고, 이후 쌍방은 대규모 공세작전 보다는 주로 방어진지 전방의 유리한 고지를 탈취하기 위한 진지전으로 변했다.
제6사단은 1952년 4월 2일부로 국군 제2군단에 배속되어 765고지-교암산을 잇는 고지군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쌍방은 서로 휴전협상을 깨지 않기 위해 대규모 기동전은 실시하지 않았으나, 고지 쟁탈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병준 일등상사가 소속된 제3포병대는 제6사단을 화력지원하고 있었다. 이에 제3포병대는 항상 포병사격태세를 유지하고, 적 침투부대의 습격에 항상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포병대는 1953년 1월 8일 야간에 적 침투부대의 습격을 받았으나, 사전에 발견하여 격멸했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준 일등상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14묘역-4판-193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8-ㅍ-03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