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준(이병준)

  • 군별 : 육군
  • 계급 : 소위
  • 군번 : 223628
  • 전몰일자 : 19530107

공훈사항

이병준 소위는 출생 일자 및 장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를 고려할 때, 그는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한 1950년 9월 하순,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1사단 수색대에 배치되었다.
제11사단은 8월 27일 영천에서 창설되었으며, 예하에 제9·제13·제20연대와 직할부대로 편성했다. 사단은 10월 초에 남원으로 이동하여 지휘소를 설치하고 호남지역에 대한 공비토벌작전 임무를 수행했으며, 작전은 크게 3단계로 구분하여 수행했다. 특히 1951년 1월 1일부터 시작된 3단계 작전은 게릴라의 근거지를 완전히 파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수색대는 지리산 중에서도 험준한 산악지대에 대한 수색 및 타격작전에 집중했다.
이병준 소위가 소속된 제11사단은 4월 6일에 국군 제8사단에 공비토벌작전 임무를 인계하고, 4월 중순에 동해안 양양으로 이동하였다. 사단은 4월 22일부터 시작된 공산군의 4월 공세를 속초-간성 일대에서 저지하다가 25일에 철수하여 양양 북방에서 적의 공격을 격퇴하고 5월 7일에 반격하여 마등령-989고지를 탈취했다. 그러나 5월 16일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공세로 다시 철수하여 대관령-강릉 선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제11사단은 5월 22일부터 반격하여 6월 중순까지 향로봉-건봉산을 연하는 선을 확보했다. 당시 이병준 소위가 소속된 수색대는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하여 사단에 보고하고, 때로는 적 보급소를 습격한 후 부대로 복귀했다. 당시 사단은 수도사단으로부터 인수한 월비산은 적의 공격으로 빼앗겼다. 이곳은 방어에 불리한 지역이라 방어에 유리한 351고지로 철수했다.
제11사단은 1952년 1월에 건봉산 작전지역을 제5사단에 인계하고 양양으로 이동하여 전기전술 숙달을 위한 교육훈련에 전념하다가 다시 3월 30일에 건봉령-건봉산 일대의 방어지역을 담당하였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가 장기간 계속되었다. 이병준 소위가 소속된 소대는 1953년 1월 7일에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매복조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분대장으로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이병준 소위는 군번으로 볼 때 전사 당시에는 이등중사였으나, 사후에 소위로 추서되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준 소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8판-1면-06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1-ㅈ-08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