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주(이병주)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2202066
  • 전몰일자 : 19510617

공훈사항

이병주 이등상사는 강원도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과 자유를 지키고자 1949년 7월 6일 육군 제1공병단에 입대했다. 제1공병단은 1948년 8월 19일 경기도 부평에서 창설되었고, 6·25전쟁 발발 당시는 제1건설공병대대, 제9야전공병대대, 창고중대, 제1정비중대로 편성되었다. 이 이등상사는 동 단에서 교육훈련에 전념함으로써 공병부대의 확장과 능력 향상에 기여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1공병단은 경인선 철교(상·하행선) 폭파 임무를 부여받았다. 28일 01시 45분경 북한군 전차가 돈암동에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육군 총참모장은 지체 없이 한강교와 경인선 철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02시 30분 한강교는 폭파되었다. 하지만 경인선 철교는 원인 불명으로 불발되고 말았다. 6월 29일부터 시작된 한강방어선전투 때 제1공병단은 공병학교 장병들과 함께 혼성 대대로 편성되어 노량진의 사육신 묘소가 있는 39고지와 월파정을 포함하여 한강 인도교와 대방동 삼거리에 이르는 강변에 배치되었다. 장병들은 반파상태에 있는 경부선 철교에 폭약을 장전하고 폭발시켰으나, 복선의 남단에 있는 교대와의 연결부분이 약간 이탈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공병단은 노량진-수원-평택으로 지연전을 펼치면서 7월 5일 오산 북쪽의 일부 교량을 폭파했고, 이후 금강방어선-소백산맥방어선으로 지연전을 펼치면서 교량폭파와 장애물 설치 임무를 수행했다.
제1공병단은 1950년 8월 제1201건설공병단으로 개칭되어 육본 직할부대로 편성되었는데, 이때 이 이등상사는 동 단으로 전속되었다. 당시 상황이 워낙 긴급했기에 건설공병단은 8월 중순까지 제1군단에 배속되어 보현산 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제766부대의 남진을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곧 육군본부로 복귀하여 전방 사단과 군단의 공병 능력을 초과하는 교량·도로 건설 및 보수와 비행장 건설 및 보수 임무를 수행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작전 때 공병단은 작전 지원 지역을 북한지역까지 확대하며 작전에 기여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38도선으로 철수하면서 후방지역의 보급로 유지와 비행장 건설 및 유지보수 임무에 진력했다. 1951년 6월 3일 건설공병단은 원주 일대에서 주보급로 보수작업을 하는 중에 북한군 침투부대의 습격을 받았다. 이 이등상사는 항상 앞장서서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군의 보급로 유지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그는 이때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6월 17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주 이등상사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11113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46판-4면-08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6-ㅍ-05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