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주(李炳柱)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8800599
  • 전몰일자 : 19510101

공훈사항

이병주 일병은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선으로 지연전을 하던 1950년 7월 중순, 경북편성관구사령부의 제7교육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공병대대에 배치되었다.
이병주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8월 중순, 제6사단은 신녕 북방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9월 공세를 격퇴하는 데 성공하고, 전 전선에서 9월 16일부터 반격을 했다. 제6사단은 9월 23일에 북한군의 조림산 방어진지를 돌파하고, 10월 6일에 춘천 북방의 모진교에서 38도선을 돌파했다. 사단은 계속 북진하여 10월 23일에 개천을 거쳐 희천까지 진격했다. 이곳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4일에 1차 총공세(일명 추수감사절 공세)를 실시했고, 사단의 선두부대는 압록강 변의 초산을 점령했다. 그러나 이미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이 적유령 산맥 일대에 숨어 있다가 10월 26일에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는 아군의 후방을 차단했다. 이에 사단 장병들은 10월 27일부터 겹겹이 싸인 포위망을 돌파하며 130km의 험준한 산길을 따라 철수하여 10월 31일에 개천에 집결했다. 이병주 일병이 소속된 공병중대도 보병부대들과 함께 철수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 위해 11월 24일을 기해 2차 총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를 실시했다. 이때도 중공군은 반격으로 국군의 후방을 차단했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큰 피해를 받고 38도선으로 철수했다. 당시 제6사단은 12월 11일에 전곡-백의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병주 일병이 소속된 공병중대는 차후 있을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주요 축선에 대해 지뢰지대와 철조망지대를 설치했다. 드디어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서울을 목표로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펼쳤다. 제6사단은 전곡 일대 방어진지에서 적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다음날인 1951년 1월 1일 새벽에 인접부대들이 돌파되어 측후방이 노출되자, 사단 장병들도 철수했다. 이날 공병중대는 최후까지 방어지역에 남아 장애물을 설치하여 중공군의 진격 속도를 지연시키고 마지막으로 덕정 방향으로 철수했다. 공병중대는 철수하는 도중에 적의 공격을 받고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으나,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주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40면-2196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2-ㄲ-09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