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일(李秉一)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37871
  • 전몰일자 : 19501025

공훈사항

이병일 일병은 1928년 8월 25일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에서 출생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낙동강 선까지 철수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이 일병은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그는 1950년 9월 20일 부산에 있는 제2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카투사(KATUSA)에 선발되어 미 제24사단에 배치되었다.
그는 첩보수집, 편의대 활동, 포로신문 등의 활동을 통해 미 사단의 작전에 크게 기여하다 제3사단 통신중대로 전속되었다. 제3사단은 9월 23일부터 추격작전을 전개하여 10월 1일 인구리 북쪽에서 38도선을 넘어 북진함으로써 최초의 38도선 돌파부대가 되었다. 이 일병과 사단 장병들은 사기충천하여 동해가도를 따라 북진했다. 패주 중인 북한군은 국군의 진격을 조금이라고 더 지연시키려고 끊임없이 박격포와 76밀리 대전차포 사격으로 국군의 추격을 견제했다. 또 도로에 수많은 지뢰를 매설하는가 하면 요소마다 엄체호와 교통호로 보강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 장병들은 이들 난관을 극복하며 일일 평균 24km의 속도로 진격했다.
사단 장병들은 10월 3일 간성을 점령하고 6일 장전을 돌파하여 8일 남대천 남방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장애물을 이용하여 강력하게 방어하는 적을 격멸하고 계속 진격했고, 10월 10일에는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물리치고 원산을 점령했다. 12일 이승만 대통령은 원산을 방문하여 사단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영광을 베풀었다.
사단은 영흥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고원 동쪽 전탄강과 송전반도 및 그 서쪽 소두류산 일대의 잔적 소탕을 위해 이동하여 수색정찰과 전투를 지속했다. 이어 사단은 미 제10군단의 원산 상륙을 엄호하기 위해 또다시 원산으로 이동하여 10월 25일까지 외곽과 시내에 대한 경계를 했다. 빠른 진격 속도에 맞추어 지휘통신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군으로부터 인수한 무전기는 수시로 고장 났고 지형적 영향으로 통화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이 일병은 통신 소통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10월 23일 적탄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0월 25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일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1판-7면-17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5-ㄴ-07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