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율(이병율)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1106981
  • 전몰일자 : 19501029

공훈사항

이병율 이등중사는 서울시 성북도 돈암동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48년 6월 1일 제1연대에 현지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예하부대로 배치되었다.
제1연대는 1946년 1월 15일 경기 양주에서 창설되어, 1949년 5월 12일 수도사단에 예속되었다. 수도사단은 동년 6월 10일부로 제7사단으로 개칭되어 동두천 축선의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약한 병력과 장비로 혼신의 힘을 다해 방어하고 있었다. 육군본부는 여러 직할부대를 동원하여 전방의 제1사단, 제6사단, 제7사단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강화했다. 사단은 노량진, 안양 일대에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켰으나, 전투력 손실이 심해 7월 5일 해체되어 제1연대는 제8・18연대와 함께 수도사단(수도경비사령부로 개칭) 예하부대로 재편되었다.
그 후 제1연대는 미군이 방어하고 있던 금강선과 대평리선이 위태롭고 또 청주 국사봉 방어선이 언제 돌파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7월 17일 보은을 거쳐 7월 20일 안동 부근으로 이동했다. 북한군 제12사단은 의성-영덕 간 50㎞에 달하는 공백이 발생하자, 8월 9-12일 사이에 청송-죽장-기계축선으로 공격하여 기계와 포항을 점령하였다.
이병율 이등중사가 소속된 사단은 이후 계속된 북한군의 공세에 맞서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방어전을 벌였다. 그와 연대병력은 북한군의 9월 공세의 일환으로 북한군 제12사단이 비학산 일대에서 공격해 오자, 수도사단은 9월 4일 안강을 포기하고 경주북방에 있는 낙산(호명리)으로 철수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9월 말 양양까지 진격하면서 38도선을 회복하였다.
이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10월 1~9일 사이에 양양-간성-양구-화천-회양-신고산-안변을 거치면서 북한군을 소탕해 10일 원산을 점령하였다. 이후 계속 함북지역인 고원-흥남 방향으로 진격하여 퇴각하는 북한군을 추격해 사살하였다. 이병율 이등중사는 통일조국을 수립한다는 부푼 꿈을 안고 진격을 계속하였으나 1950년 10월 29일 고원 부근 전투에서 북한군의 기습사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율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3판-7면-3580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23-ㄱ-09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