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운(李炳雲)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병
  • 군번 : 0150012
  • 전몰일자 : 19510309

공훈사항

이병운 이병은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1950년 8월 하순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5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이병은 영천전투에 투입되어 분전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의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이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9월 29일 제2군단에 배속되었고,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수안보-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7일 서울에 도착했다.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연대는 10월 17일 곡산에 도달했고, 20일 평양이 탈환되자 23일부터 29일까지 평양과 그 북방 일대의 잔적소탕 임무를 수행했다.
사단은 11월 1일 군우리로 집결했고, 11월 3일부터 7일까지 개천 동쪽의 비호산 일대에서 중공군 제38군단과 혈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함으로써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최초로 승리하는 부대가 되었다.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사단은 11월 22일 묘향산으로 공격을 개시했으나, 중공군 제38, 42군단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사단은 미 제8군 철수계획에 따라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을 거쳐 12월 15일 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춘천 동북방의 38도선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2월 31일 중공군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주진지가 돌파됨에 따라 상급부대 계획에 따라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적의 압박 가중됨에 따라 연대는 철수하여 1951년 1월 8일 영월 북서방의 석항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이 무렵 북한군 제2군단 병력이 영월로 진출함에 따라 연대는 14일 대야리로 이동하여 24일까지 치열한 교전 끝에 영월을 탈환했다.
2월 11일 개시된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 때, 연대는 16일 북한군 제2군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평창 일대를 내주고 후방으로 후퇴했다. 적은 계속해서 영월을 점령하려고 기도했으나, 연대는 17~18일 양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 때, 연대는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평창군 백석산 일대까지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이 이병은 용감하게 앞장서서 진격하다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3월 9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운 이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24묘역-2판-805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2-ㅊ-01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