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욱(이병욱)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04371
  • 전몰일자 : 19520502

공훈사항

이병욱 일병은 1927년 4월 14일에 경상남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15일,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카투사(KATUSA)로 차출되어 미 제7사단 제17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병욱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9월 중순, 미 제7사단은 인천상륙작전부대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발하여 9월 18일에 미 제1해병사단을 후속하여 인천으로 상륙하였다. 이후 한강 이남으로 기동하여 9월 25일에 서빙고로 도하하여 남산을 탈취했다. 이후 미 제8군이 압록강을 향해 북진할 때, 사단은 원산상륙작전부대로서 10월 27일에 부산에서 출항하여 11월 8일에 함경남도 이원으로 상륙하여 풍산-갑산 방향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사단은 11월 21일에 혜산진을 점령했다. 이 무렵에 중공군이 장진호로 진격하는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하고, 원산까지 진격하여 미 제10군단의 후방을 차단했다. 이에 사단은 혜산진에서 흥남으로 철수하여 흥남항 외곽방어선을 점령했다. 이곳에서 미 제3사단과 함께 흥남 철수작전을 지원하고, 12월 21일에 흥남항에서 철수하여 부산항에 도착했다.
사단은 대구 부근에서 부대 정비를 하고 있었는데, 중공군이 12월 31일 야간에 총공세를 실시하자, 1951년 1월 7일 북상하여 평창 남서쪽, 그리고 원주 동남쪽 백운산 고지군을 점령하였다. 이곳에서 사단은 2월 11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 4월 22일 야간부터 시작된 ‘공산군의 4월 공세’, 5월 16일부터 시작된 ‘공산군의 5월 공세’를 맞아 밀고 밀리는 기동전 끝에 홍천 남서쪽 일대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이후 5월 23일부터는 홍천에서 춘천-화천 방향으로 반격하여 5월 28일에 화천을 점령하고, 6월 13일에 적근산-주파령을 잇는 선을 확보하였다.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사단 장병들은 주로 방어진지를 보강하면서 수색 및 매복작전에 집중했다. 이는 1952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이병욱 일병이 소속된 중대는 5월 2일에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부대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욱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40면-21955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8-ㄷ-03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