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우(李炳雨)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3800584
  • 전몰일자 : 19500907

공훈사항

이병우 하사는 1930년 8월 19일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신생 대한민국을 지키고자 1950년 2월 10일 제3사단에 입대하여 제22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하사는 1950년 3월까지 북한에서 남파한 유격대 소탕작전에 앞장섬으로써 북한군의 후방교란 기도를 분쇄하는 데 기여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22연대는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6월 25일 오후 대구에서 서울로 이동했고, 27일 제1사단을 증원하여 고양 일대에서 적 제1사단과 접전을 벌였다. 연대는 6월 30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예하의 혼성제3사단에 편성되어 7월 1일 금곡리, 7월 4일 풍덕천 일대에서 북한군 제3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조치원-청주-보은 일대로 지연전을 펼치면서 적의 남진을 저지했다.
동해안 축선의 위협이 증가됨에 따라 연대는 제3사단으로 원대 복귀했고, 7월 26일부터 8월 8일까지 강구, 영덕 일대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8월 11일 적 제12사단 일부가 포항을 점령하면서 제3사단의 후방이 차단되어 고립되자, 사단은 17일 장사동에서 해상철수를 하여 구룡포에 상륙했다. 제3사단은 8월 21일 포항을 지키고 있던 민부대의 임무를 인수하고, 국부적인 반격을 감행하여 흥해 남쪽 고지일대까지 진출 후, 23일 방어로 전환했다. .
9월 1일 제3사단은 일제히 반격했고, 북한군 제5사단도 9월 2일 포항과 영일 비행장을 목표로 총공격(9월 공세)을 개시했다. 적의 강력한 공격에 제3사단의 주저항선이 돌파됨에 따라 사단은 일시적으로 철수했다가 자명동-111고지-96고지-소티재-두호동 선에 급편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9월 4일까지 혈전을 거듭했다.
9월 5일 새벽 적은 공격을 감행했고, 연대는 3시간여에 걸쳐 완강히 저항했으나 결국 방어선이 붕괴되어 형산강 변으로 철수했다. 이곳에서 연대는 9월 14일까지 북한군 제5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마침내 적의 공격을 물리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에서 최후 위기를 극복하고 총반격 태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연대 장병들은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적과 싸웠다. 이 하사는 분대원을 이끌고 앞장서서 분전하다 9월 7일 전투에서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우 하사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19528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23판-14면-8749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4-ㄲ-06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