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우(李炳雨)

  • 군별 : 육군
  • 계급 : 병장
  • 군번 : 0144548
  • 전몰일자 : 19510126

공훈사항

이병우 병장은 경상북도 경산군 와촌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38도선 일대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잦았던 시기인 1949년 12월 중순 육군에 입대하여 국군을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에 임했으며, 수도사단 기갑연대에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병우 병장이 소속된 기갑연대는 1950년 7월 5일 수도사단으로 편입되었다. 사단은 8월 4일 기갑연대를 배속시켜 8월 9일부터 9월 14일까지 전개된 기계-안강전투에서 북한군의 낙동강 방어선 돌파를 저지하였다.
이병우 병장은 낙동강방어선의 안강 지구에 투입되었다. 당시 낙동강방어선에서는 조국의 운명을 건 혈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낙동강방어선전투는 안강 일대에서 유격대로 증강된 북한군 2개 사단의 침공을 격퇴한 방어 전투였다. 이는 단순히 방어전투라기보다는 핵심지역을 낮에는 국군이 점령하고 밤에는 북한군이 점령하는 공방전의 연속이었다.
이 병장과 연대병력은 9월 16일부터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세를 물리치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반격 및 북진으로 전환하여 제3사단과 함께 10월 1일 하조대 부근 38도선을 돌파한 후 10월 10일 원산을 점령, 확보하기 위해 원산시가를 감제하는 고지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189고지-136고지 산속의 과수원 일대에 잠복하고 있던 북한군의 전차포 3문과 직사포의 포격으로 진출이 저지되었다.
이병우 병장과 장병들은 11월 25일 청진을 점령하고 30일에는 부령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 1일 청진에서 철수한 사단은 12월 17일 흥남항에서 철수하여 18일 묵호에 상륙한 후 제9사단의 양양-서림간 방어선을 인수하였다. 이어 1951년 1월 10일에는 송계리-삼척선으로 철수하였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며 언제나 최선봉에서 용맹을 발휘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병우 병장은 1951년 1월 26일 삼척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우 병장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03판-1면-03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4-ㄱ-04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