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용(李炳鏞)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250689
  • 전몰일자 : 19510622

공훈사항

이병용 하사는 황해도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38도선으로 후퇴한 1950년 12월 13일,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2연대로 배치되었다.
이병용 하사가 부대로 전입했던 1951년 1월 중순, 제6사단은 1950년 12월 31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격퇴하고, 장호원 부근의 적산리 일대에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미 제9군단은 위력수색작전으로 한강 남안까지 서서히 진격하고 있었다. 이때 중공군은 1951년 2월 11일에 2월 공세를 개시했다. 미 제9군단은 지평리-원주 선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병용 하사가 소속된 제6사단은 반격작전시 북한강 남안의 가평-의암 선까지 진출하고, 3월 22일부터 북배산-수덕산-지암리 방향으로 공격하여 4월 6일에 화악산까지 도달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 4월 공세로 후방이 차단되면서 큰 피해를 입고 가평을 거쳐 27일에 용문산 일대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그가 소속된 제2연대는 용문산 전방에 전초진지를 편성하여 점령했다.
중공군은 5월 16일부터 대규모 공격(일명 중공군의 5월 공세)을 실시했다. 이병용 하사가 소속된 제2연대는 용문산 전방 전초진지에서 전면방어까지 실시하여 중공군의 전투력을 소모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에 제6사단은 5월 24일부터 용문산에서 출발하여 계관산-북배산을 점령한 뒤, 26일에 춘천 동북방으로 진출하여 28일 화천저수지까지 진출했다.
제6사단은 얼마 동안 부대정비를 실시한 후 6월 6일부터 다시 공격하여 10일에는 최종목표인 취봉(987고지)을 점령했다. 이후 방어로 전환하여 제7, 제19연대를 당거리-782고지-1057고지에 배치하고, 이병용 하사가 소속된 제2연대는 백암산 남쪽 기슭에 배치했다.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휴전협상을 진행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이에 사단 장병들은 방어진지 보강과 교육훈련에 집중하면서 수색작전에 집중했다. 그가 소속된 중대는 6월 22일에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매복조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용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14묘역-1판-255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4-ㄴ-01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