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용(李炳鎔)

  • 군별 : 육군
  • 계급 : 병장
  • 군번 : 6300030
  • 전몰일자 : 19530615

공훈사항

이병용 병장은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 북한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을 시작하던 1950년 9월 중순, 경남 부산의 육군통신학교로 입대하여 소정의 통신교육과정을 수료한 후 육군직할의 제51통신대로 배치되었다.
이 무렵 전투부대들의 북진과 다수의 새로운 부대 창설로 인해 통신소요가 폭주했다. 이에 육군에서는 개전 이래 군 통신을 지원해 온 제51통신대대를 1950년 11월 1일 부로 해체하고, 제61통신운용대대, 제71통신가설대대, 제62통신근무대대, 제81통신창고중대, 제91통신수리중대를 창설했다. 이때 이병용 병장은 제71통신가설대대로 전속되었다. 그가 부대에 배치되었을 때의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에서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고 있었고, 제71통신가설대대는 전군을 일반지원하고 있었다.
전투부대들이 빠르게 북진하고 부대 이동이 잦아지면서 통신가설 소요도 급증했다. 하지만 당시의 통신장비는 미군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고, 정비면에서도 각 계단별 정비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며, 기지정비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야전에서 정비가 불가능하면 직접 미군 기지창으로 후송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하에서 이병용 병장은 육군본부와 각 군단 간 유선통신을 유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선두부대가 압록강까지 진출했으나,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했고,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에서 평택-삼척 선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에 성공하여 전선은 38도선 부근에서 안정되었고, 통신 지원은 큰 발전을 하게 되었다. 즉 정비단계가 설정되어 제1단계로부터 제5단계까지의 정비제도가 발전되었고, 통신보급예규(SOP)가 제정되었으며, AN 타입의 신형기재와 VHF 등의 신형장비가 보급되었다.
제71통신가설대대는 전군에서 필요로 하는 군단 후방 전 지역의 유선, 특히 나선 선로의 가설 및 보수유지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가설용 보수 자재는 대부분 미국의 군사원조로 충당되었다. 이병용 병장은 항상 솔선수범하며 통신가설에 앞장서 왔다. 그러던 중 1953년 6월 15일에 통신선로 보수작업을 하다 적의 기습을 받고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전투하다가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용 병장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5판-2면-16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8-ㅌ-07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