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완(李秉完)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709

공훈사항

이병완 순경은 1920년 4월 4일 경기도 용인군 내산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서울시경 영등포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평택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순경은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당시 서울에는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제8·제18연대와 독립 기갑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적의 선두 부대는 임진강을 건너 남진하고 있었으며, 한국 경찰은 38도선 부근 전역에서 적의 공격을 받았다. 서울을 목표로 한 적의 주공 제1군단은 연천-운천-의정부에 이르는 축선과 개성에서 문산으로 이어지는 접근로에 전투력을 집중했다.
6월 26일 의정부가 점령되어 서울이 위협을 받게 되자 서울시 비상경비사령부 산하 경찰병력 7,105명(이 순경 포함)이 서울 방어를 위해 군경합동작전에 참가하여 서울 외곽에 배치되었다.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형성했다. 6월 30일 1개 대대규모의 적이 오류동을 목표로 공격을 하자 7월 1일까지 피·아 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퇴했다. 그러나 7월 3일 전차 17대를 앞세운 적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인하여 영등포를 비롯한 오류동의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에 서울의 경찰부대는 7월 3일 수원으로 철수했다. 이어서 이 순경을 포함한 서울경찰병력 500명은 7월 4일 천안지구를 경비하는 임무에 들어갔고, 100명은 평택 주둔 미군(스미스부대)부대 경비를 지원했다.
북한군의 계속적인 남진으로 인하여 서울경찰병력은 국군과 함께 지연전을 펼치며 7월 8일 평택까지 후퇴했다. 이 순경이 소속된 경찰부대가 평택 영교리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던 중 7월 9일 북한군 제4사단의 예하부대와 교전이 벌어졌다. 이 순경은 적을 격퇴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완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50판-2면-20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4-ㅂ-04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