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옥(李炳玉)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3339
  • 전몰일자 : 19510302

공훈사항

이병옥 일병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한 11월 초순,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7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병옥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12월 중순, 제6사단은 동두천 북방의 전곡-백의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얼마 후 제6사단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대규모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맞아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정면의 적은 격퇴했지만, 방어진지 측후방으로 침투한 적이 후방을 차단함에 따라 방어진지로부터 철수했다. 사단 장병들은 덕정리-의정부-창동으로 철수했으며, 1951년 1월 2일에 경기도 광주로 이동하여 한강 남안 일대를 점령했다. 반면 중공군은 대병력을 동원하여 서울을 목표로 급속하게 진출하여 1월 4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진출을 기도했다.
이병옥 일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1월 7일에 평택-안성-장호원을 잇는 고지군으로 이동하여 죽산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반면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전력이 소진돼 더는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이에 유엔군은 1월 15일부터 적정을 파악하기 위해 위력수색작전을 실시하여 한강 남안까지 진출했다. 제6사단은 추후 있을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문막 북쪽의 판대리 부근으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이곳에서 2월 12일에 실시된 중공군의 2월 공세를 격퇴하고 21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하여 공격작전(일명 킬러작전)을 실시했다. 그가 소속된 제7연대는 2월 25일에 횡성을 공격하여 탈취했다. 이어 사단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용문산 남쪽 기슭의 광탄리(양평군 용문면)에서 미 제9군단 군단작전계획에 의거 새로운 전진 축선과 공격목표를 부여받고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소속된 중대는 3월 2일에 공격준비 중 적 침투부대의 공격을 받고 즉각 응사하여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옥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7판-5면-20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3-ㅎ-04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