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수(李炳壽)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10729

공훈사항

이병수 순경은 1923년 10월 15일 전남 화순군 춘양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전남도경 화순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화순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4일 한강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자 화순경찰은 화순-광주, 화순-나주, 화순-곡성을 잇는 주요 보급로 경비, 주요 시설 경비,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이 계속 남진함에 따라 7월 20일 전남도경은 보성으로 이동하였으며, 화순·영암·광산·나주·무안의 경찰병력은 속속 장흥에 집결하였다. 장흥에 집결한 경찰부대는 장흥을 중심으로 장흥-강진에 저지진지를 구축하여 목포 쪽으로부터의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보성에 전초진지를 설치하였다.
7월 25일 보성에 진입한 적이 휴식 중이라는 정보에 따라 7월 26일 미명을 기하여 구서칠 중화기부대와 화순·장흥·강진부대 등 250명은 3개 방면에서 적을 포위 기습하여 적 사살 30명, 생포 1명, 사이드카 2대, 따발총 2정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북한군 주력부대가 보성·목포·나주에서 장흥·강진으로 진격하자 장흥·강진에 있던 경찰은 7월 27일 완도로 후퇴했다. 8월 1일 전남경찰 총지휘권을 맡은 심재순 경감의 지시에 의거 완도에 집결하여 있던 전남 서남부지역 경찰병력은 완도지역에서 해상유격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강진·장흥·보성·화순부대가 9월 20일까지 유격전을 펼친 결과 적 175명 사살, 아군 86명 구출, 양민 330명을 구출하는 커다란 전과를 거두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이 개시되자 각 도(道) 경찰도 경찰관서 수복작전에 나섰다. 화순경찰은 10월 1일 화순경찰서를 수복한 후 지역 내 치안유지활동을 강화하며 잔적소탕작전을 실시하였다.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으로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은 가까운 산지로 들어가 공비들과 합류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공비섬멸 작전기간(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을 설정하여 전국적으로 공비섬멸을 하도록 했다. 이 순경은 제1-제2차 공비섬멸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제2차 작전이 종료된 후 화순경찰서로 복귀하여 지역 내 치안유지활동을 실시했다. 그러던 중 7월 29일 10여명의 공비가 화순 청풍지서를 습격하자 공비들을 격퇴하기 위해 화순지역의 경찰이 출동했다. 이날 이 순경은 적을 격퇴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수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8-ㅎ-098)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