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수(李秉壽)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10303

공훈사항

이병수 순경은 1929년 1월 15일 강원도 정선군 신동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강원도경 정선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봉화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순경은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정선경찰은 상부 지침에 따라 지역 내 보급로 경비, 주요시설 경비, 철도경비, 피난민 통제, 오열 색출, 치안유지와 함께 북한군의 남진에 대비하여 작전태세를 강화하였다.
7월 1일 강원경찰은 영월과 울진을 제외하고는 군의 작전에 따라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7월 2일 오후 늦게 평창 방면에서 전차를 선두로 한 적의 보·전 부대와 동해안에 상륙한 제766유격부대가 영월과 정선을 협공했다. 정선경찰은 7월 2일 새벽에 태백으로 후퇴했고, 이후 북한군의 남진에 따라 태백-봉화-청송을 거쳐 8월 18일 영천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정선경찰은 보급로 경비, 철도경비, 피난민 통제,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그 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의 퇴각과 함께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경찰관서 수복작전이 전개되었다. 먼저 동해안의 영일경찰서가 수복되었고 이어서 9월 하순경에 예천, 상주, 문경, 영주경찰서 등이 복구되었다. 정선경찰은 10월 5일 정선경찰서를 수복하고 지역 내 잔적소탕작전과 치안유지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1951년 1월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1월 4일 서울이 다시 함락되면서 아군 군경부대도 후퇴를 거듭했다. 1월 25일 국군·유엔군의 재반격이 개시되자 각 도(道) 경찰도 이에 가담했다. 정선경찰은 봉화 소천면에서 치안유지 임무를 수행하다가 중공군이 북으로 서서히 퇴각하자 봉화 북방으로 활동범위를 확대했다.
3월 3일 봉화 청옥산 부근에서 정선경찰과 적 부대 간 교전이 벌어졌다. 이 순경은 적을 격멸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수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5-ㅁ-020)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