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송(李秉宋)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07325
  • 전몰일자 : 19510516

공훈사항

이병송 일병은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한 11월 초순,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7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병송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12월 중순, 제6사단은 동두천 북방의 전곡-백의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얼마 후 제6사단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대규모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맞아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정면의 적은 격퇴했지만, 방어진지 측후방으로 침투한 적이 후방을 차단함에 따라 방어진지로부터 철수했다. 사단 장병들은 덕정리-의정부-창동으로 철수했으며, 1951년 1월 2일에 경기도 광주로 이동하여 한강 남안 일대를 점령했다. 반면 중공군은 대병력을 동원하여 서울을 목표로 급속하게 진출하여 1월 4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진출을 기도했다.
이병송 일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1월 7일에 평택-안성-장호원을 잇는 고지군으로 이동하여 죽산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반면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전력이 소진돼 더는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이에 유엔군은 1월 15일부터 적정을 파악하기 위해 위력수색작전을 실시하여 한강 남안까지 진출했다. 제6사단은 추후 있을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문막 북쪽의 판대리 부근으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이병송 일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2월 12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를 격퇴한 후 반격으로 전환하여 용문산을 점령하고, 3월 22일부터 북배산-수덕산 방향으로 공격하였고, 4월 6일에 사창리 남쪽의 화악산 일대(지암리 부근)를 점령했다. 사단은 4월 21일에 사창리까지 진출하였으나,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로 후퇴하여 4월 27일에 용문산 일대로 철수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제7, 제19연대를 배치하고, 제2연대를 홍천강 남쪽에 전초진지에 추진 배치하였다. 이에 5월 16일부터 시작된 대규모 중공군의 5월 공세를 맞아 제6사단은 한 치의 양보없이 강력히 대응했고, 쌍방 간에 포격전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날 이병송 일병은 제7연대 방어진지에서 반격을 준비하던 중 적의 포격에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송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43-ㅁ-09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