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석(이병석)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120800
  • 전몰일자 : 19520920

공훈사항

이병석 중위는 1948년 5월 초순경 서울 태능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 제7기로 입교했다(출생지 및 출생 일자 미상). 이곳에서 6개월간의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1948년 11월 11일에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수도사단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병석 중위가 소속된 제1연대는 1950년 10월 10일 원산을 탈환한 후 함경북도 길주까지 진격하였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를 시작하게 되자 함경도 지방의 많은 주민들이 피난길에 올랐다. 이 중위와 장병들은 12월 14일 함흥과 흥남으로 철수하던 중 치열한 교전을 벌여 북한군을 저지한 후 17일 흥남에서 묵호항으로 해상 철수하였다.
이병석 중위와 연대병력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1월 3일 양양 남쪽에 있는 원포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이 중위의 진두지휘 아래 장병들은 3월 9일 속사리 일대 적 지역을 위력 수색해 북한군을 멀리 구축하였고 3월 26일 제2차로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진격하여 4월 15일에는 캔자스선의 동단 남가리로 진출하였다. 이후 연대는 8월 27일 924고지와 884고지를 점령한 다음 9월 6일 향로봉-건봉산-까치봉-송현리를 방어하게 됨에 따라 재배치되었다.
이병석 중위와 연대병력은 1952년 4월 5일부로 제2군단으로 배속되어 금성 방면 작전을 계속 수행하였다. 이어 5월에는 금성-북한강 동안까지의 전선을 인수하여 동부 전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 중위와 연대병력은 화천 일대 금성천 북안 일대에서 정찰활동을 수행하다 북한군과 마주치게 되어 순간적으로 서로 총알이 빗발치듯 오가는 교전에서 중공군의 여러 명을 사살하는 수훈을 세웠으며 7월 8일 지형능선을 공격해 점령했으나 북한군의 역습을 받아 물러났다. 이후 전선은 8월까지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에서 각각 한 차례씩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9월 9일 이 중위와 연대병력은 공군의 근접지원과 포병의 지원 아래 공격을 개시하였고 고지를 향해 돌진해 고지를 점령하였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무수한 인명이 희생되는 소모전은 계속되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병석 중위는 1952년 9월 20일 김화 부근 전투에서 북한군이 투하한 포탄 파편을 맞고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석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33묘역-판-144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09-ㅎ-06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