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생(이병생)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86036
  • 전몰일자 : 19510213

공훈사항

이병생 일병은 1929년 2월 15일 경기도 화성군 오산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하면서 조국이 다시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일어섰다. 이 일병은 1951년 1월 5일 경상남도 밀양군 삼랑진에 있는 제6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16포병대대에 배치되어 관측병으로 보직되었다.
1950년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 제3차 공세를 이어 북한군 제5군단이 원주 지역에 깊숙한 돌파구를 형성하고, 제2군단이 경북 안동까지 종심 깊게 침투했다. 횡성 동북방에서 전열을 정비하던 사단은 또다시 철수하여 1951년 1월 8일 영월 북서방의 서벽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사단은 이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면서 일대에 침투한 북한군 제9, 제31사단 침투부대를 격멸하기 위한 수색정찰을 실시했다. 이때 포병대대도 포진지 구축을 하면서 영월 일대에 대한 수색정찰작전을 병행했다.
이 무렵 북한군 제2군단이 영월로 진출함에 따라 제3군단은 제3사단 제23연대를 제7사단에 배속하여 영월을 탈환하도록 했다. 사단은 1월 19일 만경대산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고, 20일 영월 탈환의 관건이었던 응봉산을 공격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이를 점령했다. 이어 사단은 24일 영월로 진격하여 이를 탈환하고 퇴각하는 적을 섬멸했다. 1월 25일 사단은 공세로 전환했고, 2월 초순까지 횡성 동북방의 창동리 일대까지 진출했다.
중공군은 2월 11일 횡성-원주 축선에 전투력을 집중하여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개시했고, 돌파구 측방의 횡성 창동리 일대에 배치되었던 사단은 분전했으나, 주진지가 돌파되면서 20km 정도 후방으로 철수를 했다. 하지만 적은 틈을 주지 않고 추격했고, 사단은 평창 일대까지 밀려났다. 사단은 영월에서 17~18일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이 일병은 관측병으로서 매 전투 시 진두에서 적정관측과 포격유도에 앞장서 왔다. 그러나 그는 제5연대를 지원하여 포격을 유도하다 2월 13일 적 포격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생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3판-40면-21930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7-ㅌ-10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