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민(李丙民)

  • 군별 : 육군
  • 계급 : 대위
  • 군번 : 14428
  • 전몰일자 : 19500626(육본 직할부대가 실제 전투에 투입된 6월 27일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

공훈사항

이병민 대위는 1924년 2월 21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호국간성이 되고자 1950년 2월경 육군사관학교 제8기로 입교했다. 그는 3개월간의 교육훈련을 받고 동년 5월 23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본부 교도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대위는 창설 초기의 어려움 속에서도 경비 임무와 교육훈련에 솔선수범 앞장섬으로써 육군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공격을 감행하자 의정부 축선에 배치되었던 제7사단은 북한군의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 무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병력 면에서 7배, 화력 면에서는 18배나 우세한 적과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사단 장병들은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분전했으나,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전쟁 개시 첫날인 6월 25일 포천이 전차를 앞세운 적의 공격에 함락되고, 6월 26일에는 의정부마저 함락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부족한 장비와 병력으로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직할부대를 전투부대로 동원해 의정부지구에 중점을 두면서 서울 방어를 위해 노력을 경주했다. 육군은 우선 육군본부 직할의 모든 재경부대를 동원해 전방의 제1사단과 제6사단, 제7사단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증강했다. 6월 25일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연대를 제7사단에 배속한 데 이어 오후에는 제18연대(-1)마저 추가로 배속했다. 6월 26일 저녁에는 이 대위가 소속된 육본 교도연대를 비롯한 육본 직할부대들을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하여 창동 방어선에 배치된 국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창동 방어선에는 국군 5개 연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실제 병력은 1개 연대 규모에도 못 미쳤다. 국군은 우이동-92고지(수유리)-278고지(수락산 서남단) 일대에 방어선을 편성했다. 27일 새벽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을 가했다. 장병들은 일제 사격을 가했으나 전차는 피해 없이 남진했고, 실탄이 바닥난 국군은 미아리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이 대위는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앞장서서 용감히 싸우다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민 대위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95095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47판-3면-01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0-ㅇ-01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