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무(이병무)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5101452
  • 전몰일자 : 19500712

공훈사항

이병무 하사는 충청남도 보령군 주포면 단교리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에 수립되었음에도 정치 및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1949년 3월 2일, 서울 용산의 제19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 대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연대는 1950년 4월 19일에 강원도 원주로 이동하여 제6사단에 예속되었고, 사단의 예비로서 교육훈련과 부대정비에 주력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기습남침을 감행했을 때, 제19연대 장병들은 원주에서 아침 7시를 기해 비상경계에 돌입했다. 제3대대 장병들은 선발대로서 출동 명령을 받고, 오후 1시에 연대에서 보낸 20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원주에서 출발하여 저녁 8시에 춘천에 도착했다. 반면 제19연대 본대는 기차로 원주에서 출발하여 청량리를 거쳐 6월 26일 새벽 5시에 춘천에 도착했다. 연대는 제7연대와 긴밀한 협조로 소양강 북쪽의 진지를 점령했다가 이날 오후에 소양강 선으로 철수하여 춘천 서측방의 진지를 점령했다.
이병무 하사가 소속된 제19연대는 6월 27일 새벽 5시에 북한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3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이때 사단에서 춘천에서 홍천으로 이동하여 제2연대를 증원하도록 했다. 이에 제19연대는 오전 10시에 현 진지로부터 철수하여 차량 이동으로 오후 7시 30분에 홍천 북방의 말고개로 투입되었다. 이곳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킨 후 6월 30일 오후 4시에 홍천에서 징발 차량을 이용하여 원주로 철수했다.
이병무 하사가 소속된 제19연대는 7월 1일 밤 12시에 북한군 제2사단 6연대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이천 지역으로 긴급히 투입되었고, 7월 2일 아침 7시에 북한군 1개 연대 규모와 전투를 시작한 이래 7월 4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연대는 7월 4일 정오에 철수하여 안성을 거쳐 진천으로 이동하여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그리고 7월 9일에 진천 지역을 수도사단에 인계하고 수안보로 이동하여 사단에 복귀했다.
제6사단은 육본 명령에 의거 7월 12일 아침 5시부터 조령과 이화령을 포함한 문경지역 방어에 돌입했다. 이병무 하사가 소속된 제19연대는 조령에 배치되어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날 조령전투에서 그는 북한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무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33판-7면–14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5-ㅂ-00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