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림(李炳林)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16473
  • 전몰일자 : 19500702

공훈사항

이병림 중위는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험난한 격동기에 청년기를 맞아 조국을 지키는 간성이 되고자 군문을 두드렸다. 1949년 12월 중순 육군사관학교 사관생도로 입교해 약 3개월간의 교육훈련을 받고 1950년 3월 15일 소위로 임관한 후 제1사단 제12연대에 배치되었다.
이병림 중위가 제1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수색(현 서울시 은평구) 및 제1사단의 책임지역인 개성과 임진강 일대에서 38도선의 방어력 증강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중위는 즉각 방어전투에 투입되었다. T-34 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그날 아침 개성을 점령하고 임진강 방향으로 공격을 확대하였다. 당시 북한군의 전투력은 아군에 비해 월등히 우세하였다.
이 중위가 소속된 사단은 임진강 도하 작전에 참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으나 북한군의 공격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은 임진강을 도하 한 후 문산-서울 축선을 지향하고 있었다. 부대 장병들은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방어하였고, 그 과정에서 연대가 구축하였던 38도선 방어진지는 6월 25일 오전 중에 무너져 버렸다.
이병림 중위의 진두지휘하에 장병들은 소규모로 분산된 채 파평산 방향으로 철수하면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어 26일에는 파평산 방어진지의 노출된 동측방으로 접근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해 주저항선이 무너졌다. 이후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사단의 주공이 320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문산리를 위협하였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연대병력은 27일 야음을 이용하여 봉일천 북쪽 위전리-도내리를 연하는 최후저지선까지 결전을 펼치면서 철수하였다.
적의 도하공격 이틀째인 7월 1일에는 영등포 대한의 적 제4사단이 미명부터 본격적으로 도하공격을 개시하였다. 적 제4사단은 이날 중으로 영등포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하루종일 집요하게 공격하였으나 이 중위와 연대병력이 필사적으로 저지하였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며 장병들에게 솔선수범하는 훌륭한 중대장이었다. 전투 경험이 없는 장병들을 지휘해 최후까지 용감하게 북한군을 방어했던 이병림 중위는 1950년 7월 2일 노량진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림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33묘역-판-88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10-ㅅ-05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