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록(李秉綠)

  • 군별 : 공군
  • 계급 : 이병
  • 군번 : 3201994
  • 전몰일자 : 19501110

공훈사항

이병록 이병은 1927년 6월 1일에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을 실시했던 1950년 10월 중순, 대구 동촌의 비행기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관측 요원으로 배치되었다.
공군은 1948년 5월 5일에 수색에서 육군항공부대로 창설되어 9월 1일 항공부대가 김포비행장으로 이동하면서 김포기지는 한국 공군의 발상지가 되었다. 항공부대는 9월 8일 미군으로부터 L-4연락기 10대를 인수받아, 9월 13일 여의도기지(汝矣島基地)에서 편대비행을 실시했다. 이후 1949년 10월 1일에 공군으로 독립하였다.
이병록 이병은 1950년 6월 25일 여의도 항공기지에서 근무할 때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북한 공군의 전력은 YAK-9, IL-10기를 포함한 전투기만 226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에 한국 공군은 연락기 및 훈련기로 L-4/5기 12대와 T-6기 10대 등 총 22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국 공군은 당시 가용한 모든 항공기를 동원해 북한군의 남진을 최대한 저지하고자 했다. 6월 26일부터 T-6기는 8개의 폭탄을 장착하고, L-4/5기도 후방석의 관측사가 2개의 폭탄을 가슴에 안고 출격하여 저공비행으로 산간 계곡을 비행하며 북한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전 항공기는 6월 27일에 보유한 폭탄을 모두 사용함으로써 정찰작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6월 27일부터 미 공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여 제공권을 장악하자, 한국 공군은 L-4/5기를 조정하여 육군본부와 군단 또는 사단에 주요한 작전명령서를 전달하는 연락 임무를 수행했다.
이병록 이병은 연락기 후방석에 앉아 보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개천으로 철수하여 부대 재정비를 실시하던 1950년 11월 10일, 그가 탑승한 연락기는 육군본부의 중요한 지시사항을 국군 제2군단에 전달하기 위해 저공비행으로 비행하다가 적의 대공포화에 맞아 항공기가 추락하면서 조종사와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록 이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8판-6면-04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1-ㄷ-04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