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두(李炳斗)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625

공훈사항

이병두 순경은 1913년 2월 19일 황해도 벽성군 벽성읍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서울시경 중구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서울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순경은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이 되자 북한 유격대가 태백산 일대에 계속 침입했다. 경찰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시흥 육군보병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경찰간부를 중심으로 4월 20일 제8전투경찰대대와 제9전투경찰대대를 편성하여 강원도 영월과 춘천에 배치하는 등 전·후방의 치안 확보에 주력했다.
6월 10일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38도선 접경지역인 경기·강원 2개 도에 비상경비태세 강화명령(갑호비상근무령)을 내려 북한의 군사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다. 서울을 목표로 한 적의 주공 제1군단은 연천-운천-의정부에 이르는 축선과 개성에서 문산으로 이어지는 접근로에 전투력을 집중했다. 국군은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제8·제18연대와 독립 기갑연대가 서울에 배치되어 있었다.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고, 전투경찰대대를 편성하여 대처하며, 해당 지역 군부대와 협조하라는 지시를 하달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이날 이 순경은 중구경찰서 정보과장의 지시에 따라 동료경찰관들과 함께 중구지역 내의 주민동향을 살피며 적의 지역 내 침입 여부, 오열 색출, 교통통제 등의 활동을 실시했다. 이 순경은 오전 11시경 오열로 의심되는 인원 2명이 필동에서 유언비어를 퍼트리며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동료경찰관 3명과 함께 현장에 출동했다. 이들은 사전 침투요원들이었는데 출동한 경찰관들과 곧바로 교전이 벌어졌다. 경찰은 현장에서 적 1명을 사살했으나 2명은 달아나고 말았다. 이 순경은 교전 중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두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50판-3면-07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4-ㅇ-016)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