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덕(이병덕)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03829
  • 전몰일자 : 19501125

공훈사항

이병덕 중위는 1929년 3월 13일에 출생했다(출생지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이 중위는 1950년 10월 5일에 입대 후 종합행정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수료 후 제2기로 임관하여 제8사단에 배치되었다.
이 중위가 입대할 무렵 제8사단은 부대를 정비하고 1950년 9월 20일부터 국군의 총반격 작전에 합류해 공격을 실시하였다. 피아간 치열한 전투 끝에 북한군은 분산되어 패주하였고 이후 1950년 10월 3일 양평지구의 적을 격파하여 적의 저항을 받지 않고 빠른 속도로 서울에 도달했다.
10월 8일에는 연천 남방에 도달해 적 1개 대대를 격파하여 철원을 점령하였다. 10월 15일에는 곡산지구를 장악, 일대의 잔적을 소탕한 후 석봉을 향해 진격하였다. 이후 계속 진격하여 11월 9일 덕천을 탈환하고 구장으로 진출해 제7연대의 엄호를 맡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구장동 일대에 배치되어 적의 남하를 저지했다.
제8사단은 불리한 전세에 영원으로 철수하여 맹산에 지휘소를 설치했으나 우회하는 중공군과 맞닥뜨려 교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교전이 장기화되고 적군이 계속 증강됨에 따라, 지연전을 펼치며 후퇴할 수밖에 없어 제6사단과 임무를 교대하고 군단 예비대로 소속되어 은산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제8사단은 1950년 11월 27일까지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또 한 번의 방어 전투를 실시했다. 중공군은 제126사단을 동부 산악지대로 우회시켜 맹산 동북쪽 애창천 계곡, 즉 사단의 배후로 침투시켰다.
하지만 수색 정찰로 이를 확인한 제8사단은 연대의 애창 방어진지를 우회하여 맹산에 집결한 중공군과 교전하였고 그 결과 중공군과 제8사단 모두 일부 병력이 분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 중위는 1950년 11월 25일 전투 중 총탄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덕 중위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9-ㄷ-030)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