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낙(李炳洛)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51798
  • 전몰일자 : 19500922

공훈사항

이병낙 일병은 1921년 12월 15일 경상북도 경주군 외동면에서 출생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6·25전쟁 발발 이후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힙겹게 저지하던 1950년 8월 중순에 대구에 위치한 육군직할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단기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동 훈련소의 조교 요원으로 배치되었다.
한편, 개전 이래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병력 확보와 각 지역 방위임무를 동시에 해결할 목적으로 7월 초순 각 도별로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하고 신병 확보와 더불어 후방지역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가 대구에서 창설되었다. 그리고 신병교육을 위해 7월 11일 제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으나, 7월 17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 제7교육대로 개칭되었다. 그 후 8월 1일 이 교육대가 육군중앙훈련소로 개칭되었다가, 8월 14일 국본 일반명령 제46호로 대구에 육군본부 직할로서 육군 제1훈련소로 재창설되었다.
이병낙 일병이 훈련소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 8월 공세를 맞이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8월 중순 전선이 왜관∼수암산∼유학산∼군위∼보현산을 잇는 대구 북방에 형성됨에 따라 대구 지역에 대한 북한군 정찰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더욱 극심해졌다. 당시 대구에는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 각종 지원부대, 정부기관 등이 밀집되어 있어 정찰대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이 워낙 긴급했고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제1훈련소는 신병훈련에 주력하면서도 동시에 인근에 출몰한 적들의 유격활동에 대응해야 했다. 훈련소는 조교를 포함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해왔다. 9월 15일 대구시 외곽에 적이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이병낙 일병이 소속된 기동타격대원들은 이들 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소탕작전에서 적의 기습사격에 맞아 중상을 입고 당시 부산에 위치한 제3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9월 22일에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낙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82-ㅅ-076)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