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길(李炳吉)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3101043
  • 전몰일자 : 19521102

공훈사항

이병길 일등중사는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정치·사회적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9년 5월 1일, 육군사관학교 교도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조교가 되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기습적인 침략을 하자, 육사 생도대대는 태릉 북쪽의 내촌 일대에 도착하였으나,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6월 28일에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이후 이병길 일등중사는 제1사단으로 전속되어 한강방어선과 지연전, 그리고 낙동강방어선의 수암산과 유학선, 다부동에서 전투했다.
이후 제20연대는 9월 25일에 경남 삼랑진의 육군 제6훈련소를 모태로 재창설되었다. 당시 이병길 일등중사는 제20연대 창설 요원으로 전속되었고, 연대는 제11사단에 예속되어 10월 초순에 광주지역으로 이동하여 지리산 서남쪽 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했다. 이후 1951년으로 접어들면서 회문산과 백아산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공비소탕작전을 실시하여 완전히 격멸했다.
제11사단은 4월 6일 호남지역 공비소탕임무를 제8사단에 인계하고, 동해안 양양으로 이동했다. 사단은 4월 22일부터 시작된 공산군 4월 공세와 5월 16일부터 시작된 공산군의 5월 공세을 맞아 대관령-강릉 선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했다. 이어 5월 22일부터 강릉-양양-건봉산 방향으로 반격하여 6월 10일에 건봉산-향로봉을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후 제20연대는 수도사단이 방어하던 월비산(459고지)을 11월 17일에 인수했으나, 북한군 제9사단이 바로 다음 날인 11월 18일에 공격했다. 연대는 11월 24일까지 수차례 공방전을 펼쳤으나, 결국은 월비산을 방어하는 데 실패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쌍방은 방어진지 보강에 힘썼다.
이병길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20연대는 1952년 4월 15일에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동하여 반공 포로와 친공 포로 간에 유혈사태를 진압하고 7월 11일에 건봉산 방어진지로 복귀했다. 이곳에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장병들은 방어진지 보강과 수색작전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그가 소속된 중대는 11월 2일에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부대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로 격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소대선임하사로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길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장병1묘역-103판-334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73-ㄷ-09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