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기(李秉冀)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상사
  • 군번 : 1900938
  • 전몰일자 : 19510324

공훈사항

이병기 이등상사는 1925년 1월 15일 충청남도 보령군 주산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조국에 헌신하고자 1949년 1월 20일 육군에 입대하여 국군을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으며, 수도사단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병기 이등상사가 소속된 제1연대는 낙동강방어선 전투에 투입되어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청송-평창-양양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9월 16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하여 9월 말 양양까지 진격하면서 38도선을 회복하였으며, 이어 10월 1일 하조대 부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하였다. 10월 10일 원산을 탈환한 후 함경북도 길주까지 진격하였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를 시작하게 되자 함경도 지방의 많은 주민들이 피난길에 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12월 9일을 전후하여 성진, 함흥, 흥남, 원산 등의 항구에는 피난민들로 큰 혼잡을 빚었다.
이병기 이등상사와 연대병력은 수송 수단이 허용하는 대로 가능한 많은 피난민을 후송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하였다. 이어 길주에서 북한군이 반격해 오고 있었다. 이 이등상사와 장병들은 12월 14일 함흥과 흥남으로 철수하던 중 치열한 교전을 벌여 북한군을 저지한 후 17일 흥남에서 묵호항으로 해상 철수하였다.
이병기 이등상사와 연대 장병들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1월 3일 양양 남쪽에 있는 원포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그와 연대는 강릉에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2월 25일부터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되었다. 이후 이 이등상사와 연대병력은 3월 9일 속사리 일대 적 지역을 위력 수색해 북한군을 멀리 구축하였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용감히 싸웠던 이병기 이등상사는 1951년 3월 24일 속사리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기 이등상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3판-3면-331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4-ㅍ-07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