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권(李秉權)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2801905
  • 전몰일자 : 19500706

공훈사항

이병권 이등중사는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1949년 1월 초순 제17연대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 과정을 마친 후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연대는 다시 원주로 철수하였고 6월 20일에는 수도경비사령부에 배속되어 서빙고로 이동하였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에 기습적으로 침략하자, 이병권 이등중사가 소속된 수도사단은 제7사단이 담당하고 있던 동두천 축선으로 증원되었다. 북한군은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40여 대의 T-34전차를 투입해 공세를 감행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전차무기인 2.36인치 로켓포는 북한군의 T-34전차를 파괴할 수 없었다. 개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38도선의 방어선이 대부분 무너졌으며, 수도 서울의 방어가 위태로워졌다. 이에 육군본부는 서울방어를 위해 수도권의 부대는 물론 후방지역의 부대까지 모조리 서울 북방에 투입하도록 명령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과 전차부대는 6월 25일 오전 초성리를 돌파해 동두천으로 진격하였다. 이 이등중사와 사단 장병들은 의정부를 거쳐 창동 방어선으로 철수하면서 전투를 계속하였다.
이병권 이등중사와 장병들은 주저항선인 동두천 북쪽 소요산 일대의 진지로 철수하여 남하하는 북한군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면서 진지를 사수했다. 그가 소속된 부대는 북한군의 보전협동부대를 저지하였으나 서측으로 우회한 북한군의 위협을 받아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수도사단은 탄약을 재보급받지 못한 상황에서 북한군 제107전차연대 소속의 전차 수십 대를 앞세운 북한군의 총공격을 받아 소요산 일대의 주저항선이 돌파되기 시작하였고, 10시간에 걸친 혈전에도 불구하고 동두천 방면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되는 난항 속에 북한군은 6월 27일 저녁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하고, 6월 28일 새벽 서울에 진입하였다. 이 이등중사와 장병들은 소부대 단위로 분산된 채 삼송리를 거쳐 행주로 철수해 한강을 도하 하였다.
이 이등중사와 사단 병력은 오류동 일대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후 7월 3일 한강방어선이 무너지자 지연전 및 재편성을 병행하며 낙동강방어선까지 철수하였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병권 이등중사는 1950년 7월 6일 낙동강방어선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권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02-ㄷ-03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