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국(李炳國)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9343349
  • 전몰일자 : 19530718

공훈사항

이병국 하사는 1930년 3월 15일 충청남도 서천군 고복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1952년 8월 21일 제주 모슬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3사단 수색중대에 배치되었다.
이 하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후의 전황은,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유엔군이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 중공군 및 북한군과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3사단은 제2군단에 배속되어 강원 양구군 백석산 서북방 임남 일대의 북한강~739고지~949고지~석장리 간의 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사단은 큰 전투 없이 현 전선을 유지하면서 수색정찰, 매복, 적진 교란 작전을 지속했다.
그러다 중공군은 국군의 금성 돌출부에 대한 본격적인 하계공세를 시작하기 전 서전으로, 1953년 4월 2일 사단 주저항선인 949고지, 973고지의 전초가 설치된 689고지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사단 장병들은 중공군 제181사단의 공격을 맞아 12일까지 8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거듭한 끝에 이 고지를 지켜냈다. 이때 이 하사와 수색중대원들은 적진에 침투하여 적의 기동상황과 화기 배치 등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여 사단에 전파함으로써 작전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사단은 6월 15일 제2군단에 다시 배속되어 화천군 백암산 전방 북한강과 금성천 분기점 상의 529고지(관망산) 전투에 투입되었다. 중공군 제180·제201사단은 6월 25일 공격을 개시했고(6월 공세), 사단은 7월 3일까지 7차에 걸쳐 역습을 감행하며 치열한 공방전을 치렀으나, 끝내 이 고지를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7월 13일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에 대해 마지막 총공세(7·13 공세)를 가했다. 금성천 북방의 여문리 일대에 배치된 사단은 중공군 제60군 예하 3개 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분전했으나, 압도적인 전력에 밀려 흑운토령-주파령-산양리까지 지연전을 펼치면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하사는 수색대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해 왔다. 그는 이 전투에서 분대원을 이끌고 지연전을 펼치다 적탄에 중상을 입고 제3이동외과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7월 18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국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3판-14면-8730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9-ㄱ-09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