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국(李秉國)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2396
  • 전몰일자 : 19520607

공훈사항

이병국 일병은 출생 일자 및 장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에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 등을 고려하여 작성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로 평택-삼척 선으로 철수하여 반격을 모색하던 1951년 2월 중순,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공병대대로 배치되었다. 그가 소속된 공병소대는 제2연대를 직접지원했다.
이병국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3월 중순, 제6사단은 중공군의 2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북배산-수덕산-지암리 방향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이후 4월 21일에 사창리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4월 공세로 큰 피해를 받고 용문산까지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격퇴하고 즉각 반격으로 전환하여 5월 28일에 구만리(화천)발전소-병풍산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6월 5일부터 백암산에서 화천으로 뻗어 내린 643고지-992고지-취봉 방향으로 공격하여 6월 10일에 적근산-백암산 선까지 확보했다.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공산군은 휴전협상을 지연하면서 군사력 증강에만 집중하자, 유엔사는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예하 부대에 공세적인 행동을 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사단은 백암산 전방에 위치한 등대리 부근의 819고지-462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공격하여 9월 21일에 확보했다. 또한 10월 13일부터 금성천을 감제하는 교암산(770고지)을 공격하여 21일에 확보했다.
이후 제6사단은 1952년 1월 10일에 미 제9군단에서 배속 해제되어 양구 일대로 이동하여 야외기동훈련을 포함한 교육훈련에 집중하였다. 다시 사단은 3월 22일에 미 제9군단에 재배속되어 김화 부근의 거리실, 원남 일대로 이동하여 미 제40사단으로부터 방어진지 일부를 인수하였고, 당시 제2연대는 봉화산(477고지)-교암산(770고지)을 연하는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병국 일병이 소속된 공병소대는 제2연대를 직접지원하여 봉화산-442고지 일대의 방어진지 상에 장벽 및 장애물을 설치하고, 이를 관리 유지했다. 이후 전선은 큰 전투 없이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는 6월 7일에 지뢰지대를 설치하던 중 지뢰의 오작동으로 폭발하여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국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2판-6면-23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5-ㄱ-02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