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국(李炳國)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5420
  • 전몰일자 : 19510104

공훈사항

이병국 일병은 경상남도 고성군 영현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8월 중순,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수색대에 배치되었다.
이병국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9월 중순, 제6사단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9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6일부터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이에 제6사단은 10월 5일에 춘천 북방의 모진교에서 38도선을 돌파하여 계속 북진했다. 사단은 10월 19일에 성천을 점령하고, 10월 23일에 희천을 점령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4일에 압록강을 향한 1차 총공세(일명 추수감사절 공세)를 실시했으나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청천강 선으로 철수했고, 11월 24일에 2차 총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를 실시했으나, 이번에도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았고, 결국은 38도선으로 철수했다. 당시 제6사단은 큰 피해를 받고 철수하여 12월 중순에 동두천-전곡 일대의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사단은 제7연대를 한탄강 남쪽의 마차산에, 제19연대는 백의리 일대의 종현산에 배치하고, 제2연대는 사단 예비로 동두천에 집결시키고, 이병국 일병이 소속된 수색대는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사단에 보고했다.
중공군은 예상대로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감행하여 서울을 점령하고자 했다. 제6사단은 중공군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대적하여 최대한 타격을 가했으나, 1951년 1월 1일 새벽에 적들이 아군의 후방지역으로 침투하여 공격함으로써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에 사단은 전방연대가 고립될 것을 우려하여 철수를 명령했다. 장병들은 방어진지로부터 철수하여 의정부를 거쳐 서울 창동으로 이동했다. 이후 사단은 1월 3일에 경기도 광주의 한강 남안에 진지를 점령했다. 이 시기에 이병국 일병이 소속된 수색소대는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1월 4일에 적에게 발견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국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9판-1면-01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3-ㄹ-00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