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구(李秉九)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269483
  • 전몰일자 : 19510927

공훈사항

이병구 이등중사는 1925년 9월 29일 전라북도 남원군 삼외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9월 초순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수도사단 기갑연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전황은 서울 함락 후 낙동강까지 철수했던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친 상황이었다. 이어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및 북진작전에 돌입했으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공세로 또다시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하였다.
이병구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1951년 1월 송계리-삼척 선으로 철수한 후, 2월 3일 공격을 개시하여 2월 7일 강릉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951년 2월 11일에 개시된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 전 전선이 밀리게 되자 다시 송계리-삼척 선으로 철수하였다. 2월 25일 중공군의 저항이 경미하여 사단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이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을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하여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병구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평창 일대에서 대관령 방향으로 조심스러운 반격작전을 계속해 설악산으로 진출하였다. 중공군은 4월 22일 서울을 목표로 제5차 공세를 감행하였다. 부대 장병들은 최후까지 용감히 싸웠으나 끝내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고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6월 4일 짙게 낀 안개로 관측이 불가한 틈을 이용하여 적은 강력한 박격포 사격의 엄호하에 이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의 전초진지인 산두곡산과 원봉 전장의 1209고지를 공격해 왔으나 치열한 격전을 펼쳐 격퇴시켰다.
1951년 8월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고지쟁탈전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무수한 인명이 희생되는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미 제8군의 작전에 참가하여 서화리 동북방의 924고지를 점령한 다음 9월 6일에 단행된 군의 전선 조정에 의거 군단 서측의 방어선이 2km 축소됨을 계기로 향로봉-건봉산-까치봉-송현리를 방어하게 됨에 따라 재배치되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죽음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던 이병구 이등중사는 1951년 9월 27일 향로봉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구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5-ㅎ-05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