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병광(이병광)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2603537
  • 전몰일자 : 19500704

공훈사항

이병광 일병은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는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49년 2월 3일 제3여단 제16연대에 입대하여 복무하다 제7사단으로 전속되어 통신중대에 배치되었다. 제7사단은 적 주공방향으로 판단된 의정부 축선의 양주군 적성에서 사직리까지 47km 정면의 38도선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사단은 6·25전쟁 발발 당시 동두천 축선에 제1연대를, 포천 축선에 제9연대를 배치하고 있었고, 통신중대는 의정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단의 예비였던 제3연대가 1950년 6월 15일부로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고, 대신 제2사단 제25연대가 사단에 예속되었으나, 주둔지 수용시설 문제로 아직 충남 온양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사단은 예비연대가 없는 상태에서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반면에 북한군은 사단 정면에 주공인 제1군단의 주력을 투입했다. 북한군은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제203전차연대 1개 대대를, 포천 축선에 제3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투입했다. 사단은 북한군의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 무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병력 면에서는 7배, 화력 면에서는 18배나 우세한 적과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 일병이 소속된 통신중대는 사단의 지휘통신망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전방 연대의 진지가 초전에 적의 집중 포격으로 파괴됨에 따라 통신선이 절단되었고, 무전기는 고장이 잦았을 뿐만 아니라, 지형적 영향으로 불통되어 통신이 여의치 않았다. 사단은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개전 첫날 포천을 내주었고, 26일에는 동두천, 의정부가 함락되었다. 사단은 창동-미아리 방어선에서 분전했으나 적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고, 통신중대는 사단사령부와 함께 28일 노량진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철수했다.
6월 29일부터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편성되었고, 혼성 제7사단은 노량진 방면의 한강선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사단 장병들은 이 지역에서 용감하게 싸우며 7월 2일까지 적의 도하를 저지했다. 그러나 7월 3일 새벽 북한군이 경부선 철교를 보수하여 전차를 도하시켰고, 이 전차들이 노량진-영등포로 진출함으로써 사단사령부와 통신중대는 안양으로 철수했다. 모든 것이 불비한 여건 속에서도 이 일병은 내 손으로 조국을 지켜내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통신 유지를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7월 4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병광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3판-40면-21910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7-ㅍ-01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